"보증금 돌려 달라" vs "나중에 줄게"… 말 뒤에 숨은 반환 리스크
엄정숙 변호사 "임차인, 내용증명·임차권등기·소송 설계부터"

(인천=국제뉴스) 이병훈 기자 = 역전세와 깡통전세가 일상화되면서 전세계약 만기가 지나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임차인들이 “집주인이 나중에 준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하소연을 쏟아내고 있다.
이는 갈등을 피한 합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임차인의 선택지를 좁히는 바람직하지 못한 지연일 뿐인 경우가 적지 않다.
18일 법도종합법률사무소의 엄정숙 부동산전문 변호사는 “기다림보다는 전세금반환소송을 포함해 전체 절차를 어떻게 설계할지부터 일찍부터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세금반환청구를 둘러싼 갈등의 첫 장면은 대체로 비슷하다. 임차인은 “보증금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임대인은 “새 세입자 들어오면 주겠다”, “대출이 조금 더 나오면 한 번에 갚겠다”는 식으로 말을 돌리며 시간을 번다.
이때가 중요하다. 임차인이 감정싸움에만 몰입하면 실제로 중요한 증거를 놓치기 쉽다. 문자 메시지, 메신저 대화, 통화 녹취, 보증금 입금 내역은 나중에 전세금반환소송에서 임대인의 지연·거절 정황을 보여주는 기초 자료가 된다.
엄정숙 변호사는 “말로만 오가는 요구는 흔적이 남지 않는다”며 “만기 전후에 보증금 반환을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보내 두는 것이 전세금반환소송의 출발선이 된다”고 설명한다. 내용증명에는 반환기일, 보증금 액수, 입금받을 계좌, 이행 기한 등을 구체적으로 적어두어야 한다. 그래야 임차인이 언제부터, 어떤 내용으로 전세금반환청구를 했는지 분쟁의 구조가 선명해진다.
전세금반환소송은 단순히 소장을 내느냐 여부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절차가 아니다. 소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임대인의 재산 상황, 향후 주거 계획, 이사 가능 시점, 가족 사정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임대인의 상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경우라면, 소송에만 기대기보다 ‘언제, 어디로, 어떻게 이사할 것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설계가 선행돼야 한다. 소송과 생활 계획을 분리할 수 없다는 의미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임차인이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경우, 임차권등기는 중요한 선택지다. 임차권등기를 해두면 집을 비우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더라도 일정한 요건 아래에서 보증금을 청구할 수 있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다만 전입신고, 확정일자, 실제 거주 여부 등과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하므로, 단순히 “등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접근은 위험하다고 엄 변호사는 말한다. 임차권등기는 전세금반환소송과 강제집행까지 엮어 설계하는 과정에서 함께 논의돼야 할 수단이라는 것이다.
전세금반환소송의 핵심은 ‘이길 수 있느냐’에서 끝나지 않는다. 판결을 받더라도 실제로 집행할 수 있는 재산이 없다면, 소송의 실익이 없다. 임대인의 부동산, 임대수입, 예금, 기타 채권 등 현실적으로 집행 가능한 재산이 무엇인지 미리 파악해 두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때 재산명시신청이나 재산조회 같은 절차는 판결 이후를 내다보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엄 변호사는 “재산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강제집행도 계획할 수 있다”며 “전세금반환소송은 소장 제출이 아니라 집행 가능성을 중심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편 소송을 늦게 제기한다고 해서 이미 갖춘 선순위 임차인의 지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입신고와 확정일자 등으로 확보한 우선순위는 시간 경과만으로 쉽게 뒤집히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질수록 임차인이 입는 손해의 양상은 달라진다. 집을 비우지 못해 직장 이동, 자녀 교육, 대출 계획 등 생활 전반이 묶일 수 있고, 임대인의 재정 상황이 더 악화돼 실제 회수 가능한 금액이 줄어들 가능성도 존재한다. 분쟁이 장기화될수록 임대인과의 대화·조정 창구가 좁아지는 점도 부담 요인이다.
엄정숙 변호사는 “전세금반환소송을 두려워해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선택을 반복하면, 법적 지위는 그대로일 수 있어도 임차인의 인생 시간과 선택지는 점점 줄어든다”고 말한다. 이어 “만기 6개월 전부터 임대인의 상환 능력과 재산 구조를 점검하고, 내용증명, 전세금반환소송, 임차권등기, 재산명시·재산조회 등을 어떤 순서로 활용할지 계획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전세시장의 불안이 길어질수록 임차인이 의지해야 할 것은 막연한 ‘나중에’가 아니다. 구체적인 절차, 기록, 전략이 필요하다. 전세금반환청구를 둘러싼 갈등의 무게 중심이 감정에서 설계로 옮겨가야 하는 이유다.
이병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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