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수 시인, 문학평론가, 전북과미래연구소장

2022년 12월 28일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으로 후백제가 비로서 ‘고대사 문화권’에 포함됐다. 전주시는 후백제 왕도복원의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후백제의 왕도인 완산주(현 전주와 완주)는 천백년 고도(옛 왕성)이다. 이제 천백년 역사를 잇는 웅대한 의미의 지도를 그려낼 수 있다. 나아가 호남의 정신사적.문화사적 일맥의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다.

◇후백제 여민정개(與民正開)는 조선의 민본(民本)과 일맥

견훤왕의 여민정개(與民正開) 정신은 조선 태조의 민본혁명과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태조와 태종은 민족정기와 왕기 서린 완산주를 조선의 본향으로 삼은 것이다. 본고에서 후백제에서 조선에 이르는 맥을 살피고자 한다.

견훤대왕은 892년에 무진주(광주)에서 ‘백제’라는 국호로 후백제를 세우고 900년에 ‘완산주’에 도읍을 정한다. 완산주는 북으로는 백제 무왕의 왕도였던 익산 금마저 바로 아래에 있으며 남으로는 신성한 모악산이 있어 이 땅을 도읍터로 정하였다. 견훤은 왕도(王都)이름을 ‘완산(完山)’이라 했다. 그리고 연호를 ‘정개(正開)’라고 선포한다.

견원은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새로운 시대를 백성과 더불어 열고자 ‘여민정개’ 정신을 실천한 혁명가이다. 서기 900년에 완산(전주성)에 백성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입성한다.

후백제는 어떠한 나라인가?  

48년간(889년~936년) 존속하며 완산(현 전주와 완주권)을 도읍지로 산성을 쌓고 커다란 왕궁을 지어 고대사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지 않았는가. 

전주는 900년부터 37년 동안 완산이란 이름으로 후백제의 왕도(王都)였기 때문에 천년고도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후백제는 비록 반세기 2대 왕조에서 멈췄지만 한국사에서 그 지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한국역사 변화와 정신사의 발전을 실천.주도했다는 면에서 새로운 해석을 해야 한다.

견훤왕은 둔전제(중국조조 실시, 전방조달 농지경작)를 실시하고 합덕지 방죽을 축조하는 등 농업생산을 증대하며 생활을 크게 개선하였다. 관개시설로 혁신적 농업경제 증진시켰다. 이는 국가의 비전인 여민정개(與民正開)의 실천이다.

만민언(임피), 합덕지 (당진)는 국가전략적 둔전을 위한 저수지이다. 유휴 군인들이 둔전을 경작하여 스스로 식량을 조달하기에 백성의 세금이 경감되고, 당시 혁신적인 수리시설로 백성들의 경작량도 배가 되었다.  

호서의 합덕방죽은 국내 제일 큰 제방이라고 정조 일성록과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당진지'기록을 보면 당진시 합덕지역에서는 1930년대까지 견훤장군을 위한 “제문, 견훤장군을 위한 감사” 제전을 거행하였다고 전한다. 합덕수리박물관에 잘 기록되어 있다.

견훤은 외교에서도 혁혁한 공로가 있다. 견훤은 외세(당)를 끌어들여 대륙을 잃고 불완전하게 통일된 한반도가 후백제를 통하여 당 역사문화권에서 벗어나고 외교의 다변화가 촉진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후백제는 오.월,거란,왜와 교류하였다. 

후백제는 백제의 후왕국이다. 한류의 뿌리가 된 백제 완산(전주)권 고유문화와 정신사를 승계하였다. 견훤은 마한과 백제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백제(百濟)’라 하고 세상을 바르게 열어보자는 뜻으로 연호를 ‘정개(正開)’라 하였다. 

고려 왕건이 왕성을 불살랐을지언정 왕도의 역사와 혼을 간직하고 있다. 전주는 후에 고려를 멸한 조선 건국의 본향의 토대를 다지게 된다. 

화엄종문 해인사 선문도량을 받은 남원 실상사파 편운화상부도에 “정개십년” 이라고 새겨져 있슴을 주목한다. 

◇후백제의 씨앗이 조선 창업의 꽃으로 피다

완산주에는 활화산 같은 문명의 기운이 하늘을 감싸고 있다. 이를 간파한 자가 견훤대왕과 이곳을 조선의 본향 풍패*라 정하고 1392년에 조선을 창업한 태조대왕이다.

오목대에서 종친들과 대풍가를 부를 때 이성계는 이 땅을 왕도 백제성으로 인식하였으며 이에 분개한 정몽주도 전주를 백제성으로 인식하고 시 ‘등만경대’를 지었다.

완산은 백제 위덕왕이 555년 지정한 뒤로 1400년간 완주와 전주가 하나로서 이어져 오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당시 전주군(완산)이 전주시와 완주군으로 분리되어 온 것이다.  만경강의 원래 이름이 중국 한나라 유방의 고향 풍패에 흐르던 강 ‘사수’ 이었던 것을 아는가. 일제가 만경강으로 개명하였다 한다.

육당 최남선은 왕건을 천고의 음모가로 규정하며, 진정한 영웅 견훤과 후백제의 몰락을 안타까워 했다. 936년 아직도 국력은 후백제가 우세했지만 후백제는 고려에 패망한다. 혁명가 견훤의 선택이다. 견훤이 퇴장을 선언하는 피날레도 장엄하다. 필자가 당시 상황과 문헌을 정리하여 견훤의 결심을 전한다.

“백성을 함부로 대하고 형제를 죽인 신검은 안된다. 차라리 건에게 천하를 맡기는게 낫다. 백성들이 더 피를 보면 안된다. 먼 훗날에 이 곳 완산 땅에서 백성을 진정 사랑하는 자가 나와서 내 꿈을 실현할 것이다.”    

◇필자가 발표한 시 ‘동고산성’을 소개한다. 

동고산성 
후백제 견훤의 꿈을 엿보다...한봉수
 
대동강가 달려 말을 먹이고
고구려 평양성 문루에 활을 걸자.
변산 줄포만에 큰 배를 띄워
황해바다 건너 대륙으로 가자.
 
승암산올라 북쪽산에 미륵을 본다.
아, 백제의 꿈이 이글거리는 하늘 아래
남쪽산 모악에 이르는 완산의 땅을 살핀다
 
이 거룩한 산에 성을 쌓고
백제의 길을 따라 말을 달리자.
백성의 피맺친 절규에 귀를 기울고
오로지 그들 더불어
세상을 바르게 펼쳐보리.
 
견훤대왕이여,
순천만 마로에서 깃발을 달려
무진주에서 선언한 그대의 언어는 
미륵정토 이 완산 땅에 뿌려져
혁명의 씨앗이 되었구려.
 
오백년후
그대의 산성에서 뻗어난 발리산을 타고
청년의 팔뚝같은 힘줄에 피가 돌아
이목과 오목을 타고 내려
아, 완전한 땅 정수리에 꽃 피우리.  

◇견훤대왕의 다이네믹한 꿈을 재현하자

견훤은 백제 무왕이 금마저에 천도한 백제의 역사를 잇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있다. 전주시와 전북도는 후백제 제전위원회를 구성하고 범도민적인 축제를 열 필요가 있다. 

남원 실상사 편운화상탑이 보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범도민적 ‘정개 축제’를, 견훤왕 전주천도행렬을 실제 견훤왕의 행로인 전남북 서부지역을 따라 ‘입성재현축제’를 개최하길 제안한다.

또한 전남이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를 건립하는 것처럼 국립후백제역사문화센터 건립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센터를 중심으로 역사.인문.교육프로그램을 추진해야 한다.

뿐만아니라 후백제 문화.창달을 위한 춤,연극,뮤지컬,시낭송대회등 공연.예술콘텐츠 개발에 적극 지원해야 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한국사에 다이네믹한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그 혁명 정신이 재정립 되어지길 바란다. 그 정신이 완산주에서 조선 창업으로 맥을 이었다. 이러한 거대한 스토리로 새로운 정신.문화.관광의 시대를 열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저작권자 © 국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