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한국 전통시장학회) 이덕훈 한남대 전 총장
(사진제공=한국 전통시장학회) 이덕훈 한남대 전 총장

지금으로부터 약 42년전 전두환(全斗煥)은 1980년 9월 1일 장충체육관에서의 간선제를 통해 스스로 대한민국의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 시기의 일본 총리는 스즈키 젠코(鈴木 善幸) 로 스즈키 내각(1980년 7월 17일 – 1982년 11월 27일)을 구성했으나  5.18 (1980년 5월 18일)광주사건, 1980년 9월 17일 김대중 내란사건 등이 터지면서 한일관계는 좋지 않았고 1982년 6월 제1차 교과서 문제가 발생하면서 대화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환경이었다.
 
박정희 정부때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하던 한국경제는 전두환의 제5공화국 출범과 동시에 2차 오일쇼크의 충격으로 1956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2.7%로 곤두박질쳤다. 새로운 산업 육성이 필요했던 전두환 정부는 외자 도입이 절실하였고, 그 돌파구를 일본에서 찾았다. 전두환은 1981년 1월 말 워싱턴에서 갓 취임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을 만나 일본도 동북아 안보를 위해 부담을 나눠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주한미군 주둔 비용에 해당하는 만큼을 일본이 한국에 경제협력 및 안보차관으로 지원하도록 레이건이 영향력을 행사해주면 그 돈으로 미국의 비행기와 탱크 등 무기를 대량 구입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1981년 4월 23일 노신영 외무부 장관은 스노베 료조(須之部量三)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현행 일본의 한국에 대한 협력 금액을 10배로 늘려 연간 20억 달러, 이를 향후 5년간 총 100억 달러를 제공해 달라고 통보에 가까운 요구를 했다. 일본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는 안보와 연관된 경제협력은 국내 정치상 곤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흐름에 야마사키 도요코(山崎 豊子) 의 불모지대(不毛地帯)의 모델로 알려진 세지마 류조(瀬島 龍三)가 등장한다. 1932년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후 1938년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여, 1939년 만주의 관동군 참모로 부임하였고, 1945년 7월 만주의 관동군 참모(중좌) 만주로 파견되었으나, 소련군의 대일참전 이후 소련군에게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서 11년간 포로생활을 하였다. 1958년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와 이토추 상사에 입사하여 능력을 발휘, 고속승진을 거듭해, 1978년 회장으로 승진하였다.

(사진제공=한국 전통시장학회) 전두환과 나카소네
(사진제공=한국 전통시장학회) 전두환과 나카소네

박정희 정권 때부터 한국과 일본의 교량적 역할을 담당해 온 세지마를 전두환은 1980년 8월에 만났다. 5·18 광주 사태로 국내외에서 민심을 잃은 전두환에게 세지마는 한국의 국가발전과 체제안정을 위해선 올림픽이나 만국박람회 같은 국가적 거대행사를 유치해 국민들의 관심을 돌려보라고 조언하여 전두환은 올림픽을 계획한다. 1981년 9월 30일에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 때 나고야와 투표로 52대 27로 서울 올림픽이 결정된다. 이때 세지마 류조는 당시 일본 정부에 나고야보다는 서울을 밀어주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하였다는 일화가 일본에서 전한다.

이 시기에 일본은 1982년 11월 27일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中曽根康弘)가 취임한다. 그런데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2년에도 일제 한국 침략을 ‘한국 진출’로, 3·1 운동을 ‘폭동’으로 표현한 일본의 고교 역사 교과서 문제가 대두하면서 한·일 외교적 마찰이 등장했다.

여기에서도 등장하는 사람이 세지마 류조이다. 그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시절(1982~1987년) 임시행정개혁추진심의회 회장으로 활약했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정책 참모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한·일 양국은 1983년 1월 13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일본 총리로서는 역사상 처음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했으며 1983년 11월 레이건 방일과 방한을 계기로 “안보경제협력”이란 명분하에 7년간 40억 불을 받도록 합의했다.

이후 전두환은 나카소네 수상에 대한 답례로 1984년 9월 6일 대한민국 대통령 자격으로 처음 일본을 방문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일본방문은 2000년의 한일관계사에서 우리나라 국가 원수로는 최초 공식 방문으로, 한·일 양국 간 새로운 우호 협력 관계의 진정한 기초를 확고하게 다지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녔다. 또한 히로히토(裕仁)천황은 9월 6일(방문 첫째 날) 저녁 만찬에서 “금세기 한 시기에 있어 양국 간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라고 했으며 이러한 한국과 관련된 과거사 발언과 사과는 이때가 한·일 국교 수립 이후 처음이었다.

전두환 대통령과 나카소네 일본총리, 그리고 히로히토 천황 등의 화해와 사과로 한·일 관계가 무르익을 무렵에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 당시 총리는 전후 처음으로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를 참배했다.

나카소네가 역대 일본 총리 중 최초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있는데, 일본의 역대 총리 중 8월 15일에 내각총리대신의 자격으로 참배한 것이 최초일 뿐이다. 실제로 나카소네의 전임자 중 "개인" 자격으로 8월 15일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총리로는 1975년에 미키 다케오를 비롯해 1978년에 후쿠다 다케오, 1980년부터 1982년까지 3년 연속으로 참배한 스즈키 젠코가 있다. 1985년 8월15일 야스쿠니 참배 며칠 전 그는 야스쿠니신사를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Arlington National Cemetery)와 동급으로 놓고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다”거나, 도쿄재판 사관을 자학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었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야스쿠니신사 참배 후에 엄청난 반대가 있었다.

(사진제공=한국 전통시장학회) 전두환 대통령과 히로히토 일본천황
(사진제공=한국 전통시장학회) 전두환 대통령과 히로히토 일본천황

이러한 야스쿠니신사 참배후에 한국과 중국의 여론이 안 좋아진 1986년 7월 25일에 후지오 마사유키(藤尾正行)문부상은 “한·일 병합은 이토 히로부미와 조선의 고종 간에 합의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망언을 했다. 이런 발언으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사임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하자 나카소네는 한국을 배려하여 일본의 헌정 사상 세 번째로 우리의 교육부 장관에 해당하는 문부대신을 해임했다.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제10회 아시안 게임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중국(당시 한국에서는 중공(中共)으로 불렸다)은 대한민국의 수교국도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의 당연히 중국의 보이콧이 예상되었으나 후야오방(胡耀邦) 당시 중국 총서기 와 나카소네의 친분으로 중국이 참가했다는 소문도 있다.

1986년 11월 8일 나카소네는 중국을 방문해 후야오방(胡耀邦) 당시 중국 총서기 와 중일정상회담을 하였다.  나카소네총리의 중국방문을 앞두고 1986년 10월 도쿄에서 열린 중국과 일본의 사전접촉에서 후지타 기미오(藤田公郞) 당시 외무성 아시아국장은 "일부 언론에서 총리의 방중이 사죄(야스쿠니 참배)를 위한 것이라고 보도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라며 미래지향적 정상회담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에 대해 쉬둔신(徐敦信) 당시 주일 중국대사관 공사는 나카소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보류 등의 대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지난해 이후 발생한 문제는 외교적으로 해결됐다.”고 답했다고 한다.
 
베이징에서 열린 중일 정상회담에서 나카소네는 후야오방에게 “군국주의가 되지 않도록 앞으로 조심하겠다.”고 말했으나 후야오방의 강경하지 않은 자세는 중국 내에서 친일 행보로 비판받았고, 후야오방은 중일정상회담 두 달 후에 실각하게 된다.

나카소네 내각(1982년-87년)은 미국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1981년-1989년)와 전두환 정부(1980년-1988년)의 시기와 비슷하게 겹치는 임기 때문에 전두환-레이건-나카소네의 한-미-일 삼국협력과 한-미 동맹, 한-일 협력관계의 전성기였다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미일 무역전쟁의 시기이기도 한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것이 유명한 플라자 합의(1985년 9월 22일)인데 여기에서 미국 달러화 의 가치를 내리고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높이는 정책을 채택하면서 1달러 240엔하던 일본엔화는 3년 사이에 120엔으로 엔고가 이뤄졌다.

그리고 1985년 미국반도체 산업협회(Semiconductor Industry Association는 일본의 메모리 수출가격을 덤핑으로 미국통상대표부(USTR)에 제소하면서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이 이루어진다. 미일 반도체 협정은 가격감시제도(Fair Market Value)를 도입하면서 한국기업의 반도체가 메모리시장에 진입하는 계기가 된다. 일부 일본인 학자들은 전두환이 받은 안보경제협력기금의 40억달러가 한국반도체로 투입되었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나카소네는 일본을 사랑하면서도 한·일 관계와 중·일관계에  나름대로 성의를 보인 일본 총리였다. 나카소네는 특히 한·일 관계에 한 획을 그은 총리로 기억될 만하고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였고 레이건-나카소네-전두환의 친밀함으로 한·미·일 공동체를 구축하는 역할을 한 거물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나는 다음을 지적하고 싶다. 나카소네는 한국을 방문(1983년)하고 답례로 전두환이 일본을 방문(1984년)하면서 한일관계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1년 뒤인 1985년 8월15일 총리의 자격으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뒤통수 법칙(?)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이것이 일본 정치인의 일본 사랑(애국)의 표시이다. 나카소네 총리는 1918년(대정(大正)7년) 출신으로 군국주의로 해군 소령까지 경험한 군인 출신이었기에 사적으로 친한 것은 친한 것 이지만 국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우익적 이었으며 천황 숭배자 이기도 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지금의 일본 정치인들도 거의가 세습이므로 내면은 나카소네 총리와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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