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학 칼럼리스트

자줏빛 순결의 고상함, 감자 꽃의 꽃말은 바로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이다. 듬성듬성 보이던 감자 꽃은 하루 이틀 사이에 온 밭이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감자 꽃이 피면 흙속에서 몸짓을 불려가는 알맹이가 비좁은 듯 몸서리치는 수확의 상상이 못내 뿌듯하다.

사월 마지막 무렵에 심은 감자가 싹이 트고 뾰족이 푸릇함을 들어내기 시작하면 농부는 설렘을 숨기지 못한다. 성급한 마음에 땅속에 손을 넣어 보지만 아직은 찬 기운에 감자가 꽃을 피우기까지는 좀 더 여유롭게 인내를 하여야 했다.

자줏빛 감자 꽃이 풍기는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터트리지만 그 반면에 하얀 감자 꽃 또한 색다른 우아함을 지울 수 없다. 하얀 꽃을 배경으로 소설을 뽐내기도 하였지만 하얀 감자 꽃이 달빛에 으스러지며 교감을 이루는 꽃 밤의 정경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마음에서 우러나는 흐뭇함에 넋을 놓을 수밖에 없는 야한 감자밭이다.

달빛이 스며드는 저녁이 되면 감자밭을 서성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꽃이 이슬에 젖는 순간 돌연 감자 꽃은 생기가 돈다. 이슬 맞은 감자 꽃은 그 자체가 가진 생명력에 탄성이 나온다.

유월의 별빛은 더 낮아지고 은하수가 서쪽으로 가는 까닭은 가까워 오는 견우와 직녀의 만남의 교각을 세우고 다리를 놓기 위함 이기도 하겠지만 알맹이를 곱게 영글어 가야만 하는 감자 꽃의 성화이기도 한 것은 또 왜일까?

꽃은 열매를 만들기 위한 몸부림이고 희생이다. 꽃이 피우면 벌과 나비는 향기에 취하고 암컷과 수컷에게 선을 뵈는 마담이 된다. 꽃들이 교미를 하여야 열매가 만들어지고 옥동자를 낳는다. 그게 자연의 선물이고 인간이 섭취하는 먹거리의 근원이다.

여름날의 꽃은 농작물이 익어가는 소리에 입 마중을 한다. 옥수수의 개꼬리에 피어나는 꽃과 도라지의 보라색은 거친 소낙비에도 자신을 움켜쥔 채 벌 나비를 꾀기 위해 갖은 교태를 부린다. 그게 바로 선물이다. 자연은 이렇게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해 헌신 하지만 우리 인간은 자연에서 얻는 혜택을 애써 모른 척 한다. 그래서 하는 말 인간의 교양수준은 자연보다 훨씬 뒤떨어진다.

감자 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순수함이 있다. 엷은 꽃잎은 새색시 같은 수줍음이 묻어나고 꽃술은 아련함이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고만고만한 키에 온 밭에 고루 퍼져있는 감자 꽃은 걷는 자의 발을 머물게 한다. 반들반들한 감자 잎은 청록의 건강함이 도드라져 꽃을 더 발하게 하는 조화가 이채롭다. 해질 무렵이 되면 감자 꽃 피어난 밭둑을 자전거로 돌아본다. 잔잔한 햇살이 저녁노을을 타고 감자밭에 머무르면 붉은 꽃은 더 환하게 산허리를 휘감아 내린다. 그리고 흰 꽃은 노을을 감싸 안아 멋진 퍼포먼스를 한다.

예사로이 넘어 갈 수 없는 감자꽃 핀 농촌의 저녁이 힘든 일상을 날려 보낸다.

꽃은 사람들을 감성에 젖게 하고 꽃은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특히 감자 꽃은 알을 영글게 하는 수확의 결정체로서 맥고모자를 눌러쓴 검게 탄 피부의 농부들에게 아낌없는 원기를 회복하게 하여준다.

행복은 순간에 만끽한다. 그래서 행복은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찰나이다. 감자 꽃 또한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는 짧은 행복과 감동을 선사한다. 어느 순간에 일시적으로 시들어가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피어난다. 꽃은 이제 감자알이 굻어 질 수 있도록 영양분을 뿌리에 그 자리를 넘겨주며 꽃의 역할을 마감하고 시들어간다. 그래서 예전엔 시기가 되면 농부는 감자 꽃을 일부러 따 주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농부의 수고로움을 용케도 덜어주고 알아서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 시들어간다. 참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게 하지만 감자 꽃의 운명은 거기 까지다.

감자 꽃이 질 무렵이면 옥수수 개꼬리가 스며들고 어느덧 벌 나비는 개꼬리에 피어난 옥수수 꽃으로 옮겨가고 두툼한 옥수수 씨알이 맺혀가면서 붉은 수염을 만들어 낸다. 어느 것 놓칠 수 없는 농작물이 자연에 순응하는 섭리를 고스란히 목격하게 된다.

그 자연의 일상 속에서 인간은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가 됨에도 불구하고 늘 거슬리려 애를 쓰지만 결코 호락호락하게 넘을 수 없는 산이다.

감자 꽃이 피는 계절에 서서 가만히 생각을 하여 보면 얼음이 녹자마자 트랙터로 흙을 부수고 거름을 뿌리던 그 시간을 돌이켜본다. 힘든 농사의 여정을 열매로 보답하고 그 열매를 맺기 전에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만들어냈다.

참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부드러운 시선을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 속에 인간이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으니까!

-안병학 칼럼리스트 약력- 강원 평창출생,농식품 컨설런트,수필가.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중이며,대표저서로는 <안병학의 농식품이야기>,<사람사는 세상에>,<이야기가 있는 마당>,<덕거리 사람들> 등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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