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4.3 70주년을 기념해 '제주4.3사건'이란 제목으로 5회 연재한다. 이 글을 쓴 고영철 님은 함덕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은 제주의 역사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향토사학자이다. 현재 흥사단 부이사장을 맞는 등 시민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고영철 선생은 “수정할 때가 여러군데 있다”고 말했으나 국제뉴스제주본부와 제주뉴스는 4.3 70주년을 맞아 4.3의 지역화와 내면화를 확산하기 위해 5회 연재한다.

 

 '우리들은 역사를 배움으로써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현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지나온 과거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지금 서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찾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개인과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1948년 6월 21일 濟友會(재경제주도민단체)가 하지 중장을 비롯한 미군정 수뇌부와 UN한국위원회에 제출한 무력진압중지청원서의 내용]
"현재의 제주도 사건은 결코 소수분자의 정치적 충동에 의한 파괴적 음모로만 볼 수 없는 다른 중대한 원인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작년 3․1절 기념행사 때 경찰 측의 경솔한 발포살상사건을 기화로 하여 폭발된 소위 관공리 총파업 사건을 군정당국이 공정하고 건설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였던들 오늘의 사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군정당국은 이 지방의 특수성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관민 전체가 위험한 파괴분자인 것 같이 대처하여 도외에서 이 지방과 하등 관련이 없는 인사와 청년단을 대량으로 유입하여 각 부락에 배치하고 그들로 하여금 평화로운 도민생활에 간섭과 폭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좌익분자를 소탕하려는 의도에서 추진된 것이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경찰과 청년단체의 박해를 면하려는 수많은 청년과 주민으로 하여금 산중의 동굴에 피신케 한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하략)(서귀포시지 606쪽)"

1. 제주 4․3 사건의 정의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해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單選單政反對)를 기치로 내걸고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禁足地域)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배경
  (1) 일본군 철수와 귀환인구 급증

제주도는 한반도 남서 해상에 자리잡은 섬으로 한국, 중국, 일본 등 극동 지역의 중심부에 있어서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받아왔다. 한국을 강점한 제국주의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 때 제주의 서쪽 지역인 모슬포에 비행장을 만들고 오무라(大村) 해군항공대를 설치하였고, 1944년까지만 해도 수백명에 지나지 않던 제주도 주둔 병력이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4월에는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결7호 작전》 즉, 대미(對美) 결전의 최후 보루로 제주를 선택하여 섬 전체를 요새화하면서 제58군사령부가 편성되어 약 6만여명의 병력으로 증강시켰다. 종전을 앞둔 1945년, 제주도에는 주민들보다 군인들이 더 많이 살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따라 제주도에 무장해제팀(팀장 그린 대령)을 보낸 것은 9월 28일이었다. 제58군 사령관 도야마 중장은 제주농업학교 건물에서 모든 계급장과 훈장 등을 떼어 버리고 일장기만을 단 채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무장해제 팀은 그 때까지 처리되지 않았던 무기와 폭발물을 바다에 버리고 비행기들을 폭파하였다. 제주도의 일본군 송환은 1945년 10월 23일에야 시작되어 11월 12일까지 12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본군은 제주도에 남아 있는 동안 미군 측으로부터 허용받은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면서 도민들에게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으며, 모리배들과 전쟁물자에 대한 뒷거래를 하였고, 심지어는 식량난에 허덕이는 제주도민 앞(제주비행장)에서 도민이 약 50일 동안 소비할 수 있는 엄청난 군량미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는 비인도적인 작태를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의 인구는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데 1945년 8월 약 22만명이었던 제주도민이 1년 사이에 28만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주로 일본에 징용․징병으로 끌려갔다 돌아온 사람들이었으며 귀환인구 중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많아서 제주동의 인구는 질적․양적으로 급격히 팽창하였다. 이렇게 귀환한 사람들은 더 이상 농민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형적인 노동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해방된 조국에는 이들을 수용할 만한 공장이나 일터가 없었다. 따라서 심각한 실업과 경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더구나 해방 이전 공산품의 40%를 일본에서 구입해 오던 제주도 사회는 일본과의 정기여객선 뱃길이 끊기고 반입 물품이 제한되면서 심한 생필품 부족 현상까지 생겼다. 해방이 되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군정장관은 미군이었고, 도지사․군수․경찰청장․서장들은 물론 관리와 경찰관도 대부분 육지 사람들이었다.
 
 (2) 인민위원회 태동
인민위원회는 여운형이 주도한 건준(건국준비위원회)에서 비롯되었다. 건준은 치안을 확보하고 현존 시설을 보존․관리하며 독립국가를 탄생시키기 위한 과도적 업무를 수행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건준은 중앙 통제에 의한 일률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종전 보름만에 건준의 지부 성격을 띤 단체가 145개나 결성되었다. 제주도 건준은 1945년 9월 10일 각 읍․면 대표 100여 인이 제주농업학교 강당에 모여 결성되었다. 이들 대표들은 선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추대하는 형식을 취했다. 임원진은 위원장 오대진(대정면), 부위원장 최남식(제주읍), 총무부장 김정노(제주읍), 치안부장 김한정(중문면), 산업부장 김용해(애월면) 등이 선출되었다. 집행위원으로는 김시택(조천면), 김필원(조천면), 김임길(대정면). 이원옥(대정면), 조몽구(표선면), 현호경(성산면), 문도배(구좌면) 등 10여명이 선임되었다. 이들은 주로 40~50대의 장년층으로 항일운동 경험자들이 많았다.

건준의 지방 조직이 ‘인민위원회’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중앙의 건준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창건을 선언한 이후부터였다. 그렇다고 인공이 선언되었다고 즉각적으로 지방 조직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된 것은 아니었으며, 제주도 건준은 9월 22일 행정 조직을 표방한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행정 기능은 미군정이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치안활동에 주력했다. 초기 읍․면의 건준이나 인민위원회 위원장 제주읍 현경호, 애월면 김용해, 한림면 김현국, 대정면 우영하, 안덕면 김봉규, 중문면 강계일, 서귀면 오용국, 남원면 현중홍, 표선면 조범구, 성산면 현여방, 구좌면 문도배, 조천면 김시범 등이었다. 이들 중 우영하, 김봉규, 현중홍, 조범구, 김시범 등은 미군정하에서 초대 면장을 지냈으며 김봉규, 현중홍은 1948년 5월까지 면장 직에 있었다.대체로 이념과 무관하게 지역 원로들이 추대되었다.

해방 직후 제주도의 정치․사회적 헤게모니는 인민위원회가 장악하고 있었다. 1945년 전남도청에서 근무했던 미군정 요원 그랜트 미드는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 섬에 하나밖에 없는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 행세를 한 유일한 존재였다.”라고 기록하였다.
 
미군정 중대는 인민위원회 치안대 간부들을 소집하여 치안유지에 협조해 달라는 요청을 하는 등 이 섬을 관할하는 데 인민위원회를 이용했으며 전심전력의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1946년 2월 미군정청 여론국에서 작성한 보고서에는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수적으로 대단히 강했으며 온건한 정책을 추구했고 이러한 정책들은 매력적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국내 언론(동아일보)도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는 건준(建準) 이래 양심적인 ‘반일제투쟁’의 선봉이었던 지도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독(韓獨)․독촉국민회(獨促國民會) 등의 우익 단체와도 격렬한 대립 없이 무난히 자주적으로 도내를 지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건준이나 인민위원회 사무실은 적산 가옥이나 향사 등을 사용했으며 애월면과 구좌면에서는 면사무소와 나란히 간판이 걸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면사무소에서 중요한 행정 업무를 추진할 때 사전에 인민위원회 간부들과 협의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었다. 인민위원회는 치안활동 외에도 농사법 교육, 학습회, 체육대회 등을 개최했고, 마을마다 야학을 통해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대정중학원, 조천중학원 등 학교 설립 사업도 추진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①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자치기구였으며 ②항일투쟁 경험자들이 주도했으며 ③온건한 정책을 추구했으며 ④미군정 중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⑤존속 기간이 전국에서 가장 길었으며 ⑥중앙이나 전남의 인민위원회 조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어 독자성이 강했다.

당시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는 미국 정보요원 그랜트 미드의 표현처럼 ‘제주도에서 유일한 당이었고 정부’였다.1946년 구좌면 세화지서에 부임했던 한 경찰의 증언을 봐도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증언 “그 무렵에는 순경들이 주민들에게 큰 소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었습니다. 왜정시대 군복을 입고 현지에 부임해 보니 옛날 주재소 건물에는 인민위원회 간판이 걸려 있엇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한 쪽 입구에 지서 간판을 세웠습니다. 한 동안 같은 건물에인민위원회와 지서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엇다는 이야기입니다. 발령통지를 받을 때 당시 김창희 제주서장이 명함에다 문도배 인민위원장에게 전하라면서 소개장을 써 주기도 했습니다. 내가 지서주임으로 부임하니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를 문 위원장에게 전했으며 한 동안 그와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배경은 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얽혀 있어서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동북아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는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명이 주둔했던 전략기지로 변했고, 종전 직후에는 일본군 철수와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명의 귀환으로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다.
 
(3)일제경찰 군정경찰로 변신, 부패, 가혹행위
광복에 대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1946년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 극심한 흉년 1946년 10월에는 흉년으로 굶주린 도민을 위하여 주정공장에 쌓아 두었던 주정 원료인 절간고구마를 다시 농가에 풀어 대용식으로 쓰게 하였다.(제주민중항쟁Ⅰ 133쪽)

악재가 겹쳤고, 이와 같은 지역 사정을 고려하지 못한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1947년 군정관리의 모리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육지에서 온 관리와 경찰들은 제주도 근무를 유배 생활로 여겼고, 게다가 심하게 부패해 있었다. 특히 경찰의 가혹행위가 심했다. 그 무렵 제주도는 중국․일본과의 밀무역 지역이었는데, 모리배와 결탁하여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탓에 주민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있던 경찰이, 밀수 전력을 가진 주민을 수배하던 과정에서 그가 섬 밖으로 도피해 버린 경우에 가축을 끌고가 잡아먹거나 팔아먹는 것은 보통이고, 그 가족을 붙잡아 고문하여 돈을 뜯어내고, 고문 끝에 죽은 사람을 바다에 암장하는 일까지 있었다.

최란수 당시 제주사태 진상조사단 경감은 경찰에 대한 주민의 원성은 극도에 치달았고, 이것이야말로 제주 4․3사태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제주사태 진상조사 책임을 맡았던 서울지방심리원 양원일 판사 또한 소요의 원인 여섯 가지를 총괄적으로 진술하면서 '경찰이 가혹한 행위를 자행함으로써 인심을 잃었다'를 한 가지로 거론했다. (신복룡, <한국분단사연구>)

(4) 3․1 경찰 발포사건과 도민총파업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터져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즈음 남로당은 3․1절 기념일을 무기휴회에 들어간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투쟁과 연계시키고 있었다. 남로당 중앙당은 이 같은 방침을 각 지방에 시달하는 한편 3․1절 기념대회를 대대적으로 거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고무된 좌파 성향의 정당과 사회단체들뿐만 아니라 우파 진영에서도 준비위원회를 결성해 가며 대중적인 집회를 모색했다. 좌파 진영에서는 좌파 통일전선인 민전(民戰=민주주의민족전선)이 기념행사를 주도했다. 민전을 중심으로 한 〈3․1절 기념준비위원회〉는 2월 5일 제1차 상임위원회를 개최했다. 이 날 회의에서는 전국 읍․면․동마다 〈3․1절 기념위원회〉를 조직하여 통일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 관덕정 앞 발포(강요배 그림)

이 같은 전국적인 군중동원계획에 당황한 군정(軍政) 당국은 “3․1절 기념행사는 가급적 제한하되 특히 가두행렬과 데모에 대해서는 엄금한다”는 지침을 전국 미군정부대와 경찰에 시달했다. 이에 따라 제주감찰청은  좌파, 우익 인사, 관공리까지 포함되어 구성한 〈3․1 투쟁기념행사제주도위원회〉의 안세훈 위원장 등 6명을 긴급히 불러들여 “기념대회는 각 리․동 또는 읍․면 단위로 개최하고, 개최할 때는 반드시 관계당국의 허가를 얻을 것이며 시위는 절대 금지한다”는 내용을 통고했다.

그러나 기념행사제주도위원회는 여타 지역에서는 면 단위별로 기념식을 갖되 제주읍․조천면․애월면 지역만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연합으로 대대적인 기념식을 갖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각계의 동참을 촉구했다. 또 2월 24일에는 각 학교 대표자 회의가 열려 기념행사제주도위원회와 보조를 같이 해 학교별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키로 하고 당일에는 오현중학교에서 교사와 학생들을 집결시킨 뒤 제북교 집회와 합류한다는 계획을 짰다.
마침내 민전의장단은 2월 25일 경찰고문관 패트리치 대위를 방문하여 집회허가원을 제출하였다. 2월 28일 패트리치는 의장단을 불러 “시위는 절대 금지한다. 기념행사는 읍내를 벗어난 서비행장에서 거행하라.”는 최후 통첩을 내렸으나 위원회는 당초 계획대로 강행하기로 하였다.(진성범, 『제주반세기』 35~37쪽)

행사에는 제주읍과 애월․조천면 주민 등 25,000~30,000명의 도민이 참가하였다. 행사 장소는 제주북국민학교였으며 다른 읍․면 지역에서도 같은 시각에 행사가 진행되었다.(제주일보 2003년 4월 3일) 대회를 마치고 시위가 종료된 후 구경꾼만 남아 있는 형국에서 오후 2시 45분께 임某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어 소란이 일어난 무렵에는 시위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벗어난 시점. 관덕정 앞에는 미군장교가 지휘하는 무장경관대와 시위대가 정면 대치하고 있었으며, 그 옆에 경찰고문관 패드릿치와 제주경찰감찰청장 강인수(姜仁秀 ~1948)가 있었다. 강인수는 전라남도 태생이고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어린이를 채던 임모 경관은 어린이를 돌보지 않고 그냥 경찰서로 들어갔다.

구경하던 군중이 경찰관을 욕하며 경찰서 앞으로 몰려나오자 경찰이 시위군중 해산을 위해 발포한 것이 6명 1947년 3․1절 기념행사 관덕정 앞 발포로 許斗鎔(남. 15, 제주북교 5학년), 朴才玉(여. 21, 젖먹이를 안고 있었음), 吳文壽(남. 34), 金泰珍(남. 38), 梁戊鳳(남, 49), 宋德洙(남. 49) (양조훈, 제주 4․3 양민학살의 진상 리플렛 참조) 등 6명이 사망했고, 8명이 중상을 당한 사건으로, 희생자 모두가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젖먹이 어린애를 업은 아낙과 국민학생 등 6명이 등 뒤에 총을 맞은 것이다. 첫 총소리가 나자 모두 도망치고 있었다는 뜻이다. 바로 이 사건이 4․3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도립병원 앞에서 두 번째 발포사건이 발생했다. 그 전날 교통사고를 당한 한 응원경찰관이 입원해 있었는데 동료 2명이 병원에 있었다. 관덕정 쪽에서 총성이 나고, 피투성이된 부상자들이 업혀 들어오자 이문규(李文奎, 충남 공주경찰서 소속) 순경이 공포감을 느껴 소총을 난사, 장제우(張濟雨) 등 행인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강인수 감찰청장은 도립병원 앞 발포사건에 대하여 “도립병원 앞 발포사건에 대하여는 대단히 미안의 뜻을 표하는 바이며 여사(如斯)한 한 경관의 실책으로 말미암아 전 경찰이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경관은 발포한 사실을 전연 부인하고 있으나 사실의 증거가 확연하므로 중앙에 지시를 얻어 엄벌에 처할 것이며 장차 여사한 사건은 발생치 않도록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하였다. 강인수 감찰청장이 「발포한 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경찰의 발포조치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함으로써 그 책임을 제주신보의 허위보도라는 데 전가하려고 하였다.

강인수는 지방언론으로부터 통렬한 비난을 받았다. 특히 제주신보는 사설을 통해 “감찰청장의 성명에 의하면 발포 당시에 S자형으로 행진하던 시위대가 현장에 있던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이 점은 본사 기자가 직접 목격하였기에 청장의 통찰이 정확하지 못한 게 있음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며 증인이 필요하다면 몇 십 명이라도 증언케 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cafe.daum.net/cj2014/청주문학 김관후의 4·3칼럼)

3월 5일에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제주도 3․1사건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위원장 김용관)'를 결성하여 조직적인 반경(反警)활동을 전개했다.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발로 민․관 합동 총파업에 돌입하였는데 13일까지 166개 기관단체에서 41,211명이 파업에 가세하였다. 이 파업은 발포경관의 처벌, 경찰수뇌부의 인책사임, 희생자유족 보상 등을 요구했다. 도내 전체 초‧중등학교가 항의휴교를 했고, 상점들이 이에 동참해 문을 닫았다. 경찰 자료에 의하더라도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전 기관‧단체가 총파업을 실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제주출신 경찰관 66명이 파업에 동참했다가 파면당한 일도 있다. 경찰발포에 항의한 3․10 총파업은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제주도내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당시 지방신문에서는 발포정당화에 항의하는 희생자 조의금 모금운동을 전개, 제주도민들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얻어냈다.(제민일보 1993년 5월 3일~5월 12일)

사태를 중히 여긴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 이 총파업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됐고, 3월 19일에는 조병옥 경무부장이 내도하여 관덕정 앞에서 벌어진 경찰 발포에 대해 "치안유지의 대국에 입각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는 담화문 발표하였으며, 응원경찰과 서청 단원 등이 대거 제주로 이동하여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달만에 총파업 사령탑이었던 임관호 산업국장을 비롯하여 500여 명이 체포됐고, 5월 23일에는 3․1사건과 관련 재판에 회부된 328명에 대해 공판을 완결했는데, 처형 52명, 집행유예 52명, 벌금형 56명, 나머지 168명은 기소유예 및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한편 사건의 핵심인 관덕정 앞 발포에 대해서는 〈경찰의 정당방위〉로, 부수적으로 파생된 도립병원 앞 발포행위는 〈일부 경찰의 무사려한 행위〉로 인정하여 도립병원 앞 발포자인 이문규 순경만을 파면하고 그 외의 요구에 대해서는 일체 거부했다.(진성범, 제주반세기 42쪽) 3월 17일에는 응원경찰대가 중문지서 앞에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군중에 발포해서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홈페이지)

[1948년 6월 21일 濟友會(재경제주도민단체)가 하지 중장을 비롯한 미군정 수뇌부와 UN한국위원회에 제출한 무력진압중지청원서의 내용]
"현재의 제주도 사건은 결코 소수분자의 정치적 충동에 의한 파괴적 음모로만 볼 수 없는 다른 중대한 원인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작년 3?1절 기념행사 때 경찰 측의 경솔한 발포살상사건을 기화로 하여 폭발된 소위 관공리 총파업 사건을 군정당국이 공정하고 건설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였던들 오늘의 사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군정당국은 이 지방의 특수성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관민 전체가 위험한 파괴분자인 것 같이 대처하여 도외에서 이 지방과 하등 관련이 없는 인사와 청년단을 대량으로 유입하여 각 부락에 배치하고 그들로 하여금 평화로운 도민생활에 간섭과 폭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좌익분자를 소탕하려는 의도에서 추진된 것이지만, 결과는 정반대로경찰과 청년단체의 박해를 피하려는 수많은 청년과 주민으로 하여금 산중의 동굴에 피신케 한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중략)"(서귀포시지 606쪽)

(4)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 결정
1947년 11월 유엔은 미국이 제출한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동시 총선거실시 후 국회 구성 통일정부 수립을 의결했으나 소련의 거부로 남한만의 단독 선거 추진을 강행하면서 1948년 초부터 남한 내 각 정당과 사회단체의 반발이 격화되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한반도의 영구 분단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반발에는 좌파뿐만 아니라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 가세하였다. 1948년 들면서 남한에 우익적 단독정부가 들어선다는 사실이 구체화되자 남로당은 5월 10일로 예정된 단독선거를 분쇄하기 위해 2월 7일 폭동을 일으켰다. 8일 정오까지 일반인 306명이 검속되고, 피살 16명, 부상 9명의 피해가 집계되었다. 소위 '2․7 구국 투쟁' 기간으로 여겨지는 2월 7일부터 5월 27일 사이에 전국적으로 경찰 64명과 그 가족 9명이 사망하였고, 경찰 145명, 그 가족 16명이 부상하였다. 그리고 남․북한에 상주하는 미군과 소련군의 동시 철수와 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등을 주장했다.(제주일보 2003년 4월 16일, OhmyNews 2006-01-20)
  
(5) 고문치사사건과 서청의 횡포
1947년 3․1사건 이후 경찰의 고문이 사회문제로 등장했는데, 1948년 3월 총파업과 관련하여 전도적으로 검거 선풍이 불어닥쳐 삼양리 한 마을에서만 94명이 연행되었다가 석방되는 등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취조 강도가 더욱 거세어졌다. 조천지서에 연행됐던 김용철(金用哲 21, 조천중학원 2학년 학생)씨 )가 구금 2일만에 고문에 의해 숨지고, 대정면 영락리 양은하(梁銀河 27)씨 경찰이 매질, 물고문, 머리칼을 천장에 매달아 놓고 송곳으로 불알을 찌르는 고문을 하다가 불알이 상해 숨졌다는 증언이 있음.

서청한림경찰대에서는 한림면 금능리의 박행구(朴行九 22)씨가 곤봉과 돌에 찍혀 초주검 상태로 끌려가 총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고문치사를 은폐하려 했고 도민들은 치열한 싸움을 벌인 결과 고문 사실을 확인하였다.(《4․3은 말한다①》556~557쪽, 제주일보 2003년 4월 16일)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으며, 11월 2일에는 서북청년회 서청(서북청년단) 단원들은 4․3 발발 이전에 500~700명이 제주에 들어와 도민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그들의 과도한 행동이 4․3 발발의 한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4․3 발발 직후에는 500명이, 1948년 말에는 1000명 가량이 제주에서 경찰이나 군인 복장을 입고 진압활동을 벌였다. 제주도청 총무국장 고문치사도 서청에 의해 자행되었다. 서청의 제주 파견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이 후원했음을 입증하는 문헌과 증언이 있다. 1949년 5월 15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해산되었으며 서북청년회 단원으로 구성된 2연대 3대대도 철수하였다.
 
제주도본부(위원장 장동춘) 결성대회를 가졌고, 이들은 자금 모금을 위한 광범위한 테러행위로 인하여 11월 18일 CIC와 지방경찰로부터 경고를 받는 사건이 있었다.
서북청년회를 비롯한 우익들의 횡포 또한 극심하였다. 이들 또한 경찰과 마찬가지로 부정부패를 일삼아 해방이 되자 해외에서 귀환하여 오는 동포들이 가져오는 생활필수품을 압수하여 다시 상인들에게 매도함으로써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 급급하였다. 이들은 또 반공사상 계몽을 이유로 경찰이나 관리․군인으로 특채되어 빈번한 불법을 자행함으로써 공권력에 대한 제주도민의 저항심리를 극대화하였다.

한편, 서청은 칠성로에 있는 강성옥의 집(현 Triumph) 2층을 접수하여 쓰고 있었는데, 1층에서 제사지내는 날 2층 바닥에 구멍을 뚫어 제상 위에 오줌을 쌌다. 이에 항의하러 갔던 강성옥은 초죽음이 되도록 맞고 1층을 빼앗겼다. 북제주군수 김영진은 서청단장 김재능에게 맞아 팔이 부러졌으며, 당시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은 서청이 구호물자를 달라는데도 주지 않았다가 1947년 11월 9일 그들에게 타살당했다.(제주참여환경연대 2004년 4월 4일 역사기행 자료 9쪽,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홈페이지)

===>계속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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