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과 난랑비 서문 그리고 천부경(天符經)의 가치

▲ 정읍시 칠보면 무성서원에 있는 최치원 선생 초상화.(사진제공=정읍시청)

(전주=국제뉴스) 이승희 기자 = 최치원 새만금관광프로젝트 두 번째 기획보도는 최치원 선생이 쓴 ‘난랑비 서문’과 최치원 선생이 백두산 석벽본을 다시 옮겨 적은 “묘향산 석벽본 천부경(天符經)”의 가치에 대해 소개한다.

군산에서 태어난 최치원 선생은 우리나라에 외래사상이 들어오기 훨씬 전에 고유한 전통문화와 정신이 있음을 알리면서 이를 난랑비 서문에 남겼다.

신라 말 고운(孤雲) 최치원은 난랑비(신라 화랑 난랑의 비문) 서문에서 “나라에 현묘한 가르침이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 그 가르침을 창설한 내용은 선사(仙史)에 있다. 이는 삼교(유교 불교 도교)에 앞서고 그것을 두루 포함한다. 모든 생명과 접촉하면 이들을 감화시킨다.”고 쓰고 있다.

유교 불교 도교를 포함하고 있는 그 현묘한 도를 선도(仙道)인 풍류도(風流道)라 한다’는 내용이다. 최치원은 우리 고대문자로 적혀서 내려온 仙道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을 81자의 한자(전서체)로 옮겨 묘향산 석벽본에 새겼다. 천부경은 항일독립운동을 만주에서 전개했던 독립군들의 수첩에서도 발견된다.

독립군들은 일제와 맞서 전투를 하면서도 틈만 나면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외우면서 국조 단군 왕검을 독립운동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弘巖) 나철 선생의 제자들이 대다수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김좌진, 이범석, 사학자 박은식, 신채호 등이 홍암 나철 선생의 제자였으며 백범 김구 선생도 그 영향을 깊게 받았다.

어떤 민족이 문화민족이냐, 미개민족이냐의 기준은 경전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우리 민족이 문화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나아가 한민족의 정신은 천부경(天符經)에 그 뿌리가 있다. 천부경에서 나온 仙道가 단학(丹學)이며, 현대에 와서는 국학(國學)이라 할 수 있다.

◆ 문화민족의 기준이 되는 경전 ‘天符經’

최치원은 저서로는 중국에서 지은 글을 모은 [계원필경(桂苑筆耕]을 비롯한 [고운문집(孤雲文集)] 30권, 그밖에 많은 비문과 행장 등이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은 고려 현종 11년 (1020)에 내 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3년 뒤인 1023년에는 문창후(文昌侯)에 추봉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태인 무성서원 (武成書院 ), 경주 서악서원 (西嶽書院 ),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배향되었다.

호남에서 최치원 문화유산은 군산·정읍·김제·순창·익산 등 전라북도 서부지역에 주로 분포한다. 전남에서도 서부인 신안과 광산 지역에 유적과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김성환 교수 논문에 따르면 충남에서도 서해안의 보령과 서산·서천 등지에 최치원 문화유산이 주로 분포하는 것을 고려할 때, 서해 연안을 따라 일종의 최치원문화루트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전북 서부지역에 최치원 문화유산이 집중되어 있으며, 특히 고군산과 옥구 일대는 최치원 문화유산의 보고라고해도 좋을 정도로 풍부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전북 서부의 최치원 문화유산은 크게 정읍 태인권과 군산 연안권으로 대별된다. 정읍의 태인과 칠보 일대 는 최치원 당시 태산 (泰山)으로 서라벌의 중앙정치에 실의한 최치원이 외직을 자청해 처음 태수를 맡은 지역이다.

최치원은 중국에서 돌아와 채 5년이 지나지 않은 진성여왕 4년(890년) 전후에 태산군(현재의 정읍시 일대) 태수로 여러 해간 봉직했다. 극히 혼란스러웠던 신라 말, 최치원의 발길이 전북서부를 비롯한 서해안 일대에 머물렀다.

▲ 정읍 태인면에 있는 최치원이 세운 피향정. 호남 제일정(湖南第一亭) 현판에서 최치원 선생 숨결이 느껴지는 듯 하다.(사진제공=정읍시청)

이 일대에 는 최치원이 태수로 재직하던 흔적을 담은 문화경관이 남아 있다 . 대표적인 사적이 태안(정읍시 태인면)의 피향정과 칠보의 무성서원이다. 피향정은 호남의 5대 정자 가운데 하나로 ‘호남 제일의 정자 (湖南第一亭)’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피향정은 최치원이 처음 세웠다고 하는데, 현재 건물은 조선 중기에 중건되었다.

무성서원은 최치원이 태산태수를 지낸 것을 기리기 위해 고려시대에 세워진 사당인 태산사(泰山祠 )를 이은 서원으로, 조선 후기 고종황제때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도 그대로 남아 있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다.

◆ 난랑비 서문(鸞郞碑 序文)에서 전통문화 뿌리가 仙道文化임을 알 수 있어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은 이렇게 적고 있다.

國有 玄妙之道 曰風流

국유 현묘지도 왈풍유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말하기를 풍류라 한다.

說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 三敎 接化群生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내포함 삼교 접화군생

이 仙道의 연원은 선사(仙家史書)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유불선 삼교를 이미 자체 내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접하여 저절로 감화시킨다.

且如入則 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차여입즉 효어가 출즉충어국 노사구지지야

집에 들어온 즉 효도하고 나아간 즉 나라에 충성하니, 그것은 노사구-魯司寇(공자)의 교지(敎旨)와 같다.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야

하염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노자)의 교지와 같다.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제악막작 제선봉행 축건태자지화야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

여기에서 풍류도(風流道)라 함은 선도(仙道)의 다른 말이다. 우리민족의 시원인 신시배달국과 단군조선시대에 유뷸선 삼교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에(BC 3661년)에 우리민족에게는 고유한 문화가 있었으니 천부경을 바탕으로 한 천지인(天地人) 사상이다.

천부경에는 “본심본 태양앙명 인중천지일(本心本 太陽昻明 人中天地一)”이라고 했으니 “우주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로 되면 내 마음은 태양과 같이 밝고 밝아지니,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녹아들어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본래 밝은 마음(陽心)이 있으니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들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민족은 여기에 바탕을 둔 천손사상(天孫思想)이 면면히 내려왔다. 하늘사람 천손으로서 인생의 목적 즉, 삶의 목적을 영혼의 성장과 완성에 두고 '진리로 이뤄진 세계(이화세계)'을 꿈 꾸었으니 이것이 바로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그래서 백범 김구 선생도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고 되었으면 한다”면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 것을 국조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에서 찾았던 것이다.

천지인(天地人) 사상, 하늘사람으로서 천손사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우리민족은 평생을 수련과 수행 속에서 살았다.

이 선도수련은 단군조선시대에는 천지화랑으로, 단군조선 47대 마지막 천황(天皇) 고열가 단군을 끝으로 단군조선시대가 끝나자, 부여 옥저 가야 등 열국시대를 지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에는 조의선인, 대선, 화랑도로 이어져 나라의 근간을 이뤘다.

다시 말하면 삼국시대 선도(仙道)수련은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대선(大仙)과 싸울아비(일본으로 건너가 사무라이로 변질되었다), 신라의 화랑도로 이어졌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와 국자랑으로 이어졌다.

전라북도가 주도해서 최치원과 선도문화(仙道文化)를 전라북도만의 고유한 콘텐츠 문화관광산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새만금에 부산시 해운대(海雲臺)처럼 최치원 동상과 천부경비를 세우고, 부산과는 색다르게 해운대에 필적하는 고운대(孤雲臺)를 선유도(仙遊島)에 짖고, 새만금 안쪽 지대에 최치원 기념관과 선도문화 기념관을 짓는다면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 해외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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