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식 변호사(사진=이지영 기자)
최기식 변호사(사진=이지영 기자)

(서울=국제뉴스) 이지영 기자 =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비록 그 길이 직선형이 아닌 나선형으로 펼쳐지더라도 인내와 끈기로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왔다는 최기식 변호사, 그는 자신의 힘들었던 삶을 재료 삼아 상처받고 베어진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대한민국을 통합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통일한국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우리 후손들이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것이 정치를 하는 이유라고 말하는 진짜 정치인, 최기식 변호사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Q. 최근 근황, 어떻게 지내시는지?

변호사와 국민의힘 의왕과천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으로서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강연과 세미나, 지역에서의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데요. 한 사람의 유권자라도 더 만나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Q. 원래 어릴적 꿈은 무엇이었나?

고등학교 시절 어렴풋이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형님이 읽으셨던 고시 합격기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 이라는 책을 우연히 읽고 나서 ‘고시를 합격하면 인생이 바뀌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고등학교 2, 3학년 때는 경제와 도덕, 사회를 꽤 잘했는데 법대가 잘 맞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정치를 하기 위한 과정으로 법대 졸업 후 변호사를 개업하고 정치에 입문하기로 계획을 세웠었지요.

Q. 부모님의 교육철학은 어떤 것이었나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땀흘리며 일하시던 아버지께는 성실함과 정직함을 그리고 어머니께는 자애로움을 배웠습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를 살며 18세에 강제 징용을 다녀오셨는데 재산이라고는 밭 70평이 전부였습니다. 가난때문에 형과 누나들은 일찍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저는 다행히 막내라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생선을 팔기도 하셨고 농사를 짓기도 하셨는데 집을 찾아오시는 분들에게는 꼭 밥이라도 지어서 대접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아버지가 나가실 때는 항상 문밖에까지 나가서 인사를 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Q.사법고시 통과하실 때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그때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들이 한꺼번에 왔습니다. 저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매형이 돌아가시고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시던 작은 형님이 사고를 당하시고 정서적 의지처였던 여자 친구마저도 믿음을 저버렸던 너무나 힘든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를 친아들처럼 아껴주시던 분의 도움으로 극단적인 어려움을 이겨내고 사법시험을 치렀고 번번이 떨어졌던 그 시험을 가장 어려운 시련 속에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편인데 그 시기를 계기로 개인적으로 더 신앙이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의 최기식 변호사(사진=최기식 변호사)
학창시절의 최기식 변호사(사진=최기식 변호사)

Q. 검사시절 가장 주안점을 두었던 사고나 철학은 무엇이었나?

큰 의미에서는 ‘회복’입니다. 당사자가 수긍하지 못하는 수사는 실패한 수사이고, 당사자의 수긍을 얻기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자애와 진실이 마주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시편 85, 11)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검사들이 정의를 이야기하는데 사랑이 없는 정의는 죽은 정의이고 정의가 없는 사랑도 올바른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과 ‘정의’를 겸비하는 것이 좋은 검사의 덕목인 것이죠. 정의감에 불타는 검사들이 정의를 너무 앞세우면 수사는 성공적으로 했을지 모르지만 당사자는 평생 검사들에게 받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실제로 그런 이유로 검사들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검사로서 만난 사람들에게 ‘당신을 굉장히 존중한다 하지만 이만큼은 잘못했으니까 잘못한 만큼은 벌을 받고 가야 된다’라고 충분히 설명해주고 이해시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적어도 인간적으로 모멸을 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대학재학시절 김일수 교수님께서는 ‘사랑과 정의의 형법학’을 강의하시면서 법률가, 특히 검사는 ‘사랑’과 ‘정의’ 두 개를 다 겸비해야 된다고 강조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Q.실제로 검사시절 남다른 소통능력으로 난제들을 많이 해결해 왔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보통의 가정보다 더 가난하고 불화가 많았던 환경으로 인해 마음고생을 정말 많이 하며 자랐습니다. 대학생 때에는 힘들게 살아왔던 제 어린 시절을 숨기고 싶었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저를 힘들게 했던 그 고통은 저에겐 좋은 재료가 되어 많은 사람들과 공감대를 이루고 그들을 회복시키는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검사라는 직업상 소위 법을 어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특히 이혼가정 등에서 힘들게 자라 불량청소년이 된 이들을 만나 그 아이들에게 제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 부모들, 아이들과 서로 부둥켜안고 울게도 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상처가 아물고 서로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돈 때문에 고소사건이 발생하면 아무리 가까웠던 사이라도 정말 원수가 되어 많이 싸우게 되는데 저는 유독 그렇게 적이 된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일을 잘했습니다. 확률로 따지면 세 커플 중 두 커플을 화해시켰었는데. 어쩌면 죽을 때까지 서로 적이 되어 싸울 수도 있는 그 사람들이 화해하게 되는 것을 지켜보며 정말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아픈 경험이 있었기에, 고통을 겪어 봤기 때문에 가능한 저만의 노하우겠지요.

대학졸업식(사진=최기식 변호사)
대학졸업식(사진=최기식 변호사)

Q.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무엇인가요

일심회 간첩단 사건으로 만난 ‘마이클 장’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제가 만약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면 저는 그 사람을 설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가난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때 점심으로 수돗물을 마시던 이야기를 했을 때 제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변호사보다 검사를 더 신뢰하게 된 신화가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구속된 6명의 간첩 중에서 마이클 장만 유일하게 자백을 했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선합니다. 그날도 변호사가 낮에 마이클 장을 만나 입단속을 했을 텐데 저는 비장하게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고 이야길 꺼냈습니다. 그는 “검사님, 제가 방에 가서 한 번만 더 생각해 볼게요.”하더니 잠시 후 “검사님,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됐습니다. 내가 검사님 믿고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하고 진술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열흘 동안 973쪽에 이르는 진술을 타이핑했습니다. 그 진술로 거의 트럭 몇 대 분량의 증거들을 싹 꿰어서 일심회 간첩단 사건이 유죄로 인정되었습니다.

그 무렵 매일 새벽마다 과천교회에서 마이클 장과 마이클 장만을 믿고 있었던 그의 어머니를 위해서 또 그 사건이 터지자마자 떠나버린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때는 아침에 일어나 샤워하고 정장입고 나가서 새벽기도 하고 바로 출근하던 때였는데요. 기도를 마치고 나서 중앙지검에서 그를 마주하면 마음이 정말 절절해졌었습니다. 아마 그런 마음들이 서로 통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최기식 변호사가 집필한 책과 기타서류들(사진=이지영 기자)
최기식 변호사가 집필한 책과 기타서류들(사진=이지영 기자)

Q.북한대학원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시고 검사직 사직 시 ‘탈북민의 삶을 보듬고 싶다’는 사직서 문구가 기사화 될 정도로 북한과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져오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여러 경험을 통해 통일이 바로 우리나라의 미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통일 한국만이 부강한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으로 가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생 때로 기억합니다. 소위 민주화운동을 하던 학우들을 보며 ‘언젠가 내가 이 친구들보다 더 많은 땀과 눈물로 더 열심히 조국을 위해서 일하겠다. 반드시 나라를 위해서 일할 때가 있을 것이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습니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도에 독일이 통일이 되었잖아요. 그 때 ‘통일’이라는 화두가 제 머릿속에 들어왔습니다. 1996년도에 사법연수원에 들어갔고 그때 갓 설립된 ‘통일법학회’가 운명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통일’에 대한 관심으로 최전방을 경험하고 싶어서 22사단에 지원하여 군법무관으로 3년을 보냈습니다. 검사 근무지를 지원할 때도 서울중앙지검에서 북한을 다룰 수 있는 공안 1부로 지원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이후 대검찰청으로 발령을 받아 검찰연구관이 되었을 때 윤석열 대통령님을 처음 만났고, 당시 저는 미래기획단으로 활동을 하면서 ‘통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2008년도에는 독일 베를린에 외교관 자리가 생겨 2년 동안 통일된 독일을 직접 경험하고 기라성 같은 독일 통일의 주역들을 만나 인터뷰한 자료를 가지고 책을 만들면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법무부의 통일본부과에 가고 싶어서 무작정 과천으로 이사하고 발령을 기다렸는데 기적처럼 귀국하자마자 9일 만에 통일법무과장자리로 발령이 났습니다.

통일법무과에서는 2년 동안 개성공단의 남측 대표로서 북쪽 대표들과 5대 5로 양자회담도 하고 통일과 법률관련 아카데미를 만들어서 후진들을 양성 했는데 로스쿨 학생들을 중심으로 1년에 100명씩 배출해냈습니다. 그리고 북한 인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법무부와 통일부, 법제처에 흩어져 있던 통일법제관련 데이터베이스 자료들을 전부 한 곳으로 모아서 누구든지 활용할 수 있도록 정리를 하고 북한 인권기록보존소 소장을 끝으로 북한 관련 기관의 근무를 마쳤습니다.

저는 통일로 가는 길목의 중간에 있는 하나의 큰 이정표가 ‘북한 인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궁극적으로 통일은 북한주민의 인권을 온전히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지금은 탈북민을 위한 변호를 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무료 변론도 해주면서 현재 위치에서 통일과 북한 인권에 도움될 만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뒤돌아보면 ‘통일’이라는 화두에 제 인생을 던짐으로써 현실적인 관점에서 더 높은 명예와 부를 누릴 수 있는 기회들을 많이 흘려보냈습니다. 검사생활을 하면서 더 좋은 자리에 갈 수도 있었고, 검사장 승진을 바랄 수도 있었지만 젊은 날에 품었던 통일을 통한 애국을 실천한다는 정신으로 현실적인 유혹보다는 북한과 관련한 일들을 선택하였고 그것이 지금의 제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통일이 바로 우리나라의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통일 한국만이 부강한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으로 가는 열쇠라고 봅니다.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념 갈등의 문제, 분단으로 인한 비용과 소모적인 모든 법적·사회통념적 갈등상황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신념이 있었기에 현실적으로는 더 어렵고 힘들고 계속 손해를 보더라도 끝까지 그 길을 추구하며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최기식 변호사(사진=최기식 변호사)
최기식 변호사(사진=최기식 변호사)

Q.북한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북한 관련해서 진보 정부에서는 평화적인 교류 협력을 우선하고, 보수 정부에서는 북한 인권을 우선합니다. 비슷한 딜레마 속에서 독일은 빌리 브란트(Billy Brandt)가 독일의 수상이 되면서 동방 정책인 오스트 폴리틱(Ostpolitik: 서독은 미국과의 긴밀한 연계를 유지하며 동유럽과의 관계 개선을 목표하는 정책 기조)을 내세우면서 접근을 통한 변화 전략을 썼습니다. 사회민주당(SPD: 중도좌파 성향을 띠는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기독교민주연합 (CDU:중도 보수정당으로, 대자본가 층에서부터 중간 계급에 이르는 보수층을 기반으로 자유경제가 정책 기조)이 서로 교차로 집권을 하면서도 쭉 일관된 기조를 지켜왔습니다.

동독 정부도 다섯 손가락이 그대로 다 맞진 않지만 적어도 세 손가락은 맞장구를 쳐주면서 기브 앤 테이크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습니다. 서독민이 동독으로 무제한 여행을 갔었고 동독에서도 무제한은 아니지만 연금 수령자라든지 가족의 혼사가 있다든지 하는 경우는 여행을 허락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상황이 안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북한입장에서는 동독이 그렇게 무너지는 것을 봤기 때문에 철옹성같이 걸어 잠근 상태에서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만 열었던 것이지요. 북한은 이 자유 경제의 물결이 북한 내부로 흘러들어오지 못하게 안간힘을 썼습니다. 이것이 남북한과 동서독의 큰 차이입니다.

정권에 따라 통일정책의 기조가 확확 바뀌는 것도 큰 문제이지만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통일에 대한 준비입니다. 우리 정부도 통일 준비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통일준비위원회 등을 만드는 등 나름의 준비를 하고자 했고 통일을 준비하는 과가 각 부처에 16개에서 17개가 있습니다. 법무부에 통일법무과처럼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등 거의 각 부처에 관련 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유기적인 통일준비를 위해 통일관련 각 부처들이 서로 소통하며 통일에 대한 통합적인 설계도를, 즉 전체적인 그림을 함께 그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통일에 대한 이런 설계도를 그리고 종합적인 준비에 대한 대안을 생산하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많은 매력적인 기회들이 아닌 북한과 통일에 관련된 기관과 부서를 지원해 끊임없이 연구해왔습니다.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최기식 변호사(사진=최기식 변호사)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최기식 변호사(사진=최기식 변호사)

Q.최근 정치인으로도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국민의힘 의왕 과천지역 당협위원장이 되셨습니다. 어떻게 입문하시게 되셨는지요?

원래 어릴 때부터 정치를 하고 싶었습니다. 친구들이 ‘최기식은 항상 사법고시를 패스해서 변호사 개업하고 나중에는 정치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하곤 했다’고 회상할 만큼 저는 제 인생의 방향에 대해서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98년도에 우연히 의왕, 과천을 알게 되었고 의왕의 여유롭고 향토적인 모습과 과천의 도회적인 향기가 한데 어우러진 모습이 제 정서랑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과천으로 아예 이사를 와서 터를 잡았습니다. 저의 세 아이들은 모두 과천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35년 전, 제가 18~19살 때 처음 세웠던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집념과 인내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현실적으로 더 좋은 기회보다는 저의 꿈과 비전, 그리고 통일에 대한 저의 사명을 향해서 직선로가 없어도 나선형으로라도 그 목표를 향해 계속 달려왔습니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당협위원장 선출’공모였습니다. 당협위원장 선출을 위한 공모가 있는 것을 알고 응모를 했고 면접을 치렀습니다. 면접당시 한 면접위원께서 “최후보님 20년 동안 검사로 영감님 소리 들으셨는데 지역주민들과 소통이 되시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때 머릿속에 저희 사무실 청소와 건물관리를 해주시는 누나 같은 아주머니와의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그분은 제가 명절 때 마다 편지글 써서 작은 선물도 드리곤 했던 분이신데 어느 날 자기 같은 사람에게 왜 잘해 주냐고 물으시길래 “저희 둘째 누님이 70이 다 되셨는데 지금 부산에서 건물관리를 하고 계십니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 대화가 생각나서 “저는 검사생활하면서도 제 형제들 생각에 제 어깨에 한 번도 힘을 줘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지역 주민들께 다가가 가장 낮은 자세로 소통할 수 있는 준비가 다 돼 있습니다.”고 답을 했고 제 진심이 전달되었는지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최기식 변호사(사진=최기식 변호사)
최기식 변호사(사진=최기식 변호사)

Q.의왕, 과천을 위해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발전 방안이 있다면요?

과천은 정부청사가 있었던 도시입니다. 각 부처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지금은 법무부만 남아 있긴 하지만 3기 신도시, 또 지식정보타운이 들어오면서 이제는 엄청나게 빽빽한 도시가 될 예정입니다. 2023년 8월 기준 8만 인구가 약 15만 정도의 도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부 기능을 분담하기 위해 지어진 행정도시이자 계획도시이며 대표적인 전원도시인 과천이 인구의 과유입으로 앞으로 10년 안에 베드타운으로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환경은 훼손되고 자족 기능을 갖지는 못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많죠. 전통적으로 과천이 갖고 있는 청계산과 관악산과 양재천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이 상당히 훼손되는 것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인 신도시 개발에 있어서도 난개발이 되지 않도록 컨트롤을 해준 다음에 지식정보타운이 들어오고 중외제약 등의 제약회사를 비롯한 첨단 산업단지들이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과천은 서울에서 가깝기 때문에 바이오산업이나 유망한 기업들을 많이 유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래야 세수도 확보되고 자족도시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과천을 대표할 만한 것으로는 ‘전통문화’가 있습니다. ‘무동답교놀이’, ‘줄타기’, ‘나무꾼 놀이’ 등이 있고 ‘추사 김정희’선생도 과천 인물입니다. 이렇게 독보적이고 훌륭한 전통을 어떻게 현대화시키고 전수를 해나가느냐가 관건인데 저는 과천만의 이러한 전통을 현대적인 요소와 유기적으로 접목해서 과천주민뿐만 아니라 경기도를 포함한 수도권 거주민들과 외국인들까지도 찾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 향연의 장이 곧 문화 전수의 장이 되고 이것이 곧 유기적 협업을 통해 수익까지 창출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살기 좋은 자연환경을 가진 첨단 지식산업단지이자 전통 문화 예술을 통한 새로운 융,복합 문화도시, 이것이 과천이 지향해야 될 미래라고 보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살기 좋은 도시 1등’ 이라는 막연한 칭호 말고 사회적 생산기반과시민편의시설을 갖추었으면서도 전통을 새롭게 해석해서 현대화된 문화를 유기적으로 창조해내며 미래비전을 선도할 첨단지식산업을 유치해서 제대로 된 ‘1등 도시’로서의 가치를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의왕시는 교통문제가 심각합니다. 의왕시는 긴 고구마 줄기 같이 생겼으면서도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지역은 내손 12동과 청계동 등으로 구성된 상단, 두 번째는 오전동과 고천동으로 구성된 중간 지역, 마지막은 군포와 맞닿아 있는 부곡동이 길쭉하게 연결되어 있고 외부로의 교통이 거의 다 차단이 돼 있어요. 다행히 올 연말즈음 GTX가 개통하게 되면서 강남까지 5~10분 사이에 주파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또 안양 인덕원에서 화성 동탄시를 잇는 ‘인동선’, 경기남부의 핵심 전철망 ‘월판선’등의 착공으로 대략 2028년에서 2030년 정도가 되면 의왕이 철도교통으로 굉장히 좋은 여건이 만들어집니다. 지금은 교통 문제에 획기적인 대안이 될 프로젝트들의 첫 삽을 뜨는 시기인 만큼 앞으로 4년 내지 8년이 소요될 이 사업이 완공에 이르기까지 집권당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의왕시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향후 펼쳐질 난개발대책입니다. 의왕시는 현재 그린벨트가 80% 가까이 되는데 교통문제가 해결되면 보존해야 할 곳과 개발해야 할 곳들을 잘 정리해서 자연환경을 살리면서도 지역경제 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현명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의왕시는 지리적으로 과천, 안양이 붙어 있는 만큼 세 지역의 중간지대에 문화 공연장과 같은 소통의 공간을 만들어서 남부 수도권뿐만 아니라 경기 남부에 있는 내·외국인들이 함께 즐기고 교류하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통합의 장으로도 활용해야 합니다. 결국은 통합이잖아요. 외국인들이 내국인들과 서로 통합되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국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지적인 요소를 십분 활용하여 문화와 예술을 통해 조화로운 통합을 만들고 경제도 활성화 시키는 것, 이것이 제가 만들고 싶은 과천, 의왕의 비전입니다.

원희룡 장관과 만남(사진=최기식 변호사)
원희룡 장관과 만남(사진=최기식 변호사)

Q.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우리사회가 분열과 갈등을 넘어 화합과 공존의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대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남북 공동선언 실천연대’ 등 이적 단체 사건과 최근 ‘민주노총 간첩 사건’ 등을 보면 북한은 끊임없이 남한 사회를 흔들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건들을 직접 경험한 검사 출신이자 탈북민들을 많이 만나본 사람으로서 반드시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북한 인권개선과 통일 준비를 위한 설계도를 미리 그려야 한다고 봅니다.

당장의 현실에 안주하거나 지엽적인 문제에 매몰되지 않고 50년, 100년 뒤를 보고 국가의 미래를 설계해야 합니다. 교육 문제와 지방 소멸 문제도 우리가 봉착한 상당히 큰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제가 2018년 서울대학교 로스쿨 학생들이 만드는 ‘법학평론’에 '통일한국의 바람직한 통치 구조 모색=소위 ‘중위연방제’를 중심으로‘라는 70쪽 짜리 논문을 썼고나름의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요약하면 독일식 연방 국가를 벤치마킹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한을 대략 9개 정도의 주로 나눈 다음 각 주에 국립대학 2개 정도를 세워서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그 지역의 대학을 나와서 마치 한 국가인 것처럼 그 주에서 살게 하자는 방법론인데요. 대학을 진학해 학업을 계속하는 사람들이나 특정한 기술을 습득하려는 사람들이나 취업 전부터 특정 나이가 되면 연금을 지급해서 별반 차이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하면서도 자신의 특기를 살릴 수 있도록 해서 그 지역에서 자리 잡게 해주면 교육문제나 지방소멸의 문제는 웬만큼 해결되리라 봅니다.

특히 통일이 되면 북한에 있는 젊은 층으로 추산되는 약 500만 명이 수도권으로 올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부분에 대한 대책도 각 주를 하나의 국가처럼 운영을 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돌파할 만한 정치력은 아직 없고 우리 사회 또한 수용할 준비가 안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제 입장에선 독일식 연방제는 한번 만들어 보고 싶은 미래의 그림입니다. 아무리 지원금을 주고 아파트를 지원해도 풀리지 않는 저출산 문제도 이런 방식이면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최기식 변호사(사진=이지영 기자)
최기식 변호사(사진=이지영 기자)

Q. 변호사님이 꿈꾸시는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요?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하는 미래, 계층·이념·지역·성별 등으로 너무 분열되어 있는 우리 대한민국의 통합, 아무리 노력해도 회복하기 힘든 사람들을 경제적·물질적일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까지 도움을 주어서 다시 일어나고 도약할 수 있는 회복의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정치의 가치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보자기에 싸놓았던 가치들을 이제는 풀어 펼치고자 합니다. 고난과 상처를 알기에 그것을 치유할 줄도 알게 된 것처럼 동족상잔과 분단의 고통을 겪었기에 ‘통일 한국’은 세계에서 치유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꿈꾸는 나라는 온 세계의 가난하고 소외된 민족들과 나라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통일 한국’ 입니다. 제국주의나 자민족 우월주의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 나라를 배려해줄 수 있는 그런 부강한 나라, 우리 후세들이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너무 자랑스럽다고 느낄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드는 것이 정치인으로서의 꿈이고 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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