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과 독도-①

▲ (사진제공 =호담정책연구소) 정연철 호담정책연구소 소장.

조선시대 태종 때부터 해금(쇄환)정책이 시작되면서 울릉도에 사람이 들어가 사는 것을 국가에서 금지했다.

그러나 울릉도와 독도 주변지역의 풍부한 해산물과 육지생활에서의 사정들이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울릉도롤 향하게 하였다.

특히, 해금(쇄환)정책으로 조선인들의 울릉도 거주가 공식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자 일본인들이 이 섬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안용복은 부산 동래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왜관’ 가까운 곳에서 성장한 관계로 일본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사정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왜관을 자주 드나들면서 대마도가 일본과 조선 사이의 모든 교역을 오랫동안 독점하면서 자행한 부정과 비리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안용복이 바닷가에서 자란 탓에 바다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러한 안용복에게 있어 일본인들의 울릉도에서의 불법적인 어로행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중대한 범죄행위였다.

그러던 1693년 봄, 우리 나이로 40세가 된 안용복이 울릉도로 가기로 결심을 하였다. 비록 조선 조정의 해금(쇄환)정책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부산 동래에서 듣고 보는 일본인들의 울릉도에서의 불법적인 행위는 안용복에게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그였기에 그의 어머니는 안용복을 보다 정의롭고 올바르게 세상을 살아가도록 가르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용복은 대마도 사람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울릉도 행은 대마도와는 관계없이 단행하였던 것이다.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를 거쳐 백기주(伯耆州)로 들어가 울릉도와 독도에 불법적으로 드나드는 일본인들의 행위를 문제 삼았고, 이런 그의 행위에 대하여 에도 막부까지도 안용복의 이의를 수용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안용복이 1693년 봄에 울릉도로 갔다가 그해 겨울이 되어서야 돌아왔으므로 약 1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가 대마도와 관계없이 일본에 나타나 울릉도 문제를 거론하게 되자, 대마도에서는 안용복에게로 찾아와 자신들이 자행하고 있던 부정과 비리를 무마시키려 했다.

그리고 그러한 대마도 사람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기에 안용복이 귀국하는 과정에서 대마도에서는 그가 에도 막부로부터 받았던 서계며 물건들을 탈취하였던 것이다.

1693년 안용복의 일본 방문은 독도 문제에 있어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행위였다.

그의 행위는 독도 영유권 문제를 두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공방을 펼치게 하여 에도 막부가 울릉도(죽도)도해금지령을 내리게 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부정과 비리를 자행하던 대마도 사람들에게 긴장과 더불어 올바른 교역을 하도록 하는 효과를 불러왔다.
 

<2차례에 걸친 안용복의 일본 방문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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