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자와 얼자에 대해

▲ 정연철 호담정책연구소 소장(국제뉴스DB)

우리가 ‘대원군(大院君)’이라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대부분 조선 제26대 왕이었던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일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대원군은 흥선을 포함하여 모두 3명이다.

대원군이라 함은 조선시대 왕위를 계승할 적자손(嫡子孫)이나 형제가 없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때, 신왕의 생부(生父)를 호칭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호칭을 받은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德興)대원군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全溪)대원군과 흥선대원군 등 3명이 있었다.

최근 TV방송에서 조선 선조 임금의 통치와 관련하여 임진왜란 와중에서 해전의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를 공개적으로 질투한 이유는 선조가 적자손이 아닌 신분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을 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서자(庶子)와 얼자(孼子)에 대한 조선시대의 사실을 살펴본다.

양반이란 신분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조선시대에 있어 첩의 소생을 이를 때 양인(良人) 첩과의 사이에 낳은 자손은 서자이고, 천인(賤人) 첩과의 사이에 낳은 자손은 얼자라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서자와 얼자에 대한 차별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주자학의 귀천의식과 유교사상이 자리 잡게 되면서 서자와 얼자의 등용에 제한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법전인 ‘경국대전’에 의하면 서자와 얼자는 과거시험에 있어 문과나 생원, 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여 양반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하였다. 때로 제한된 범위에서 등용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였으나, 이때에도 아버지의 관직 높낮이나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서자와 얼자들이 신분 상승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했고, 한편으로는 그 수도 계속 늘어나자 명종 초인 1550년대에 들어와서는 서얼 허통(許通)이 되어 양인 첩의 경우에는 손자부터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과거시험에 있어 생원이나 진사과 응시자를 유학(幼學)이라 부르는데, 이들에게는 유학이라 부를 수 없도록 하였고, 합격문서에 서얼 출신임을 밝히도록 하였다.

16세기 말에는 이이(李珥)와 최명길(崔鳴吉) 등이 서얼 허통을 주장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그후 1777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서자와 얼자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정유절목(丁酉節目)을 발표하고 규장각(奎章閣)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두어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과 같은 학식있는 서얼 출신들을 등용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차별완화조치가 시행되었으나, 서자와 얼자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폐지된 것은 고종 31년(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서였다.

인간의 신분은 출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갖추어져야 한다. 단지 서자와 얼자라는 이유로 대단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어떠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조선시대를 생각하자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했던 사회질서 속에서 임금의 신분으로 서자와 얼자들의 능력을 인정하고 관료로 등용하여 그들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정책을 베풀었던 정조의 용기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제 우리나라도 국내 총인구중 외국인의 비율이 2019년 4.9%를 기록하여, 통상적으로 학계에서 다문화사회라고 보는 5%에 근접하고 있다. 아직은 국내에 정착한 외국인을 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지만, 과거 서자와 얼자에 대한 정책을 교훈 삼아 다문화인들이 우리나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배려와 응원이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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