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가와 전염병 예방

▲ 정연철 호담정책연구소 소장(국제뉴스DB)

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도다
둘은 나의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아내)이지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이 시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처용(處容)이 불렀다는 노래이다.

처용이 밤늦도록 서울(경주)을 돌아다니며 놀다가 집에 들어가 보니 자기 잠자리에 웬 다른 남자가 들어와 아내와 동침을 하고 있었다. 처용은 화를 내기보다는 위와 같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물러 나왔다. 그러자 아내를 범하던 자가 그 본모습인 역신으로 나타나서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대범함에 감동하여 약속을 하나 하였다고 한다. 이후로 처용의 형상이 있는 곳이면 그 문안에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대문 앞에 그려 붙여 역신의 방문을 피했다고 한다.

여기서 역신이란 전염병을 의미한다.

처용의 이 설화로 인해 민간에서는 처용의 얼굴을 문에 붙여 한해의 병을 피하고자 하였고, 제웅 혹은 처용이라고 하여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길에 버려 액을 막았다고 한다. 궁중에서는 섣달 그믐날 처용의 얼굴을 한 탈을 쓰고 처용무를 추는 나례(儺禮)를 행함으로써 나쁜 기운을 막고 전염병을 쫓고자 하였다. 관아에서도 매년 한해를 시작하기 전 처용탈을 쓰고 처용무를 추는 것을 의례로 하였다.

처용무는 처용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신라 말엽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져 내려온 우리나라 전통의 춤이다.

최근 중국 무한에서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하여 전세계가 비상상황인 가운데 2월 8일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24명의 확진 환자가 발생하여 그 심각성이 고조되고 있다.

오늘날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전염병은 인간의 생활과 관련하여 심각한 문제가 되므로 신라시대에도 전염병은 중대한 관심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1천 년 이상을 이어져 내려오며 잡귀를 쫓는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는 처용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처용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어느 날 대왕이 개운포(開雲浦, 학성 서남쪽에 있는데, 지금의 울주다)에서 놀다가 돌아가려 하였다.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길을 잃고 말았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동해(東海) 용의 조화입니다. 마땅히 좋은 일을 해주어 풀어야 할 듯합니다.”그래서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해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기 때문에 그곳을 개운포라 불렀다.동해의 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와 정사를 도우니, 이름은 처용(處容)이라 하였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도록 하고, 급간(級干) 관직도 주었다.
 
[삼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 편

이 이야기는 신라 제49대 왕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년) 때 일어난 일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헌강왕 때는 당시 수도였던 경주부터 지방까지 집과 담이 서로 맞닿아 있고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으며 길에서는 음악과 노래가 끊이지 않는 태평성세의 시기였다고 한다. 신라 하대이기는 했으나 헌강왕 때 신라는 경주에 있는 모든 집에서 나무를 때지 않고 숯으로 밥을 지을 정도로 풍요의 정점을 찍은 시기였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헌강왕은 불교와 국학에 관심을 가진 문화적인 임금이었고 상당히 풍류를 즐겼던 것 같다. 그가 행차할 때마다 각 지역의 신이 나타나 그에게 춤을 선보였다는 것을 보면, 그는 춤과 노래도 꽤 좋아했던 것 같다.

이러한 헌강왕이 동해로 행차했을 때 나타난 처용과 그의 가족은 왕에게 역시 노래와 춤을 선보이고 신임을 얻는다. 헌강왕은 처용이 나타났을 때 절을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지켜 동해를 바라보는 절 망해사를 지었다. 처용은 형제들과 헤어져 왕을 따라 경주로 와서 정착해 아내도 얻고 벼슬도 얻었다. 이때 그가 얻은 아내는 헌강왕이 소개해 주었기에 대단한 미인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바, 역신이 그의 아내를 넘보는 것도 수긍이 간다.

[삼국유사]에서는 처용을 용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처용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실제로는 당시 울산 지방에 있었던 호족(豪族)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혹은 당시 신라에 내왕하던 서역인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처용무에서 보이는 처용탈의 생김이 매우 이국적인 것과 [고려사] 악지에 기록된 처용의 모습을 볼 때 그가 외국인일 가능성은 매우 높은 듯하다.

신라 현강왕이 학성에 갔다가 개운포로 돌아왔을 때, 홀연히 한 사람이 기이한 몸짓과 괴이한 복색을 하고 임금 앞에 나아가더니, 노래와 춤으로 덕을 찬미하고 임금을 따라 서울로 들어갔다. 그는 자기를 처용이라 불렀으며 언제나 달밤이면 시중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으나, 끝내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당시 그를 신인이라 생각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겨, 이 노래를 지었다.
 [고려사] 권제71, 36장 앞쪽~뒤쪽

여기서의 기록을 미루어보면 기이한 몸짓과 괴이한 복색에서 그가 신라인이 아니라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일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실제 헌강왕 시절 동해의 울주 지역은 번화한 항구였고 [삼국사기]에 헌강왕 때 보로국(寶露國, 여진)과 흑수국(黑水國, 말갈) 사람들이 신라와 통교를 청하기도 하였으며,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의 교섭을 꾀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시기 국제적인 교류가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처용을 서역인으로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고대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에 신라와 연관된 기록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처용이 서역인일 수 있다는 개연성이 높아졌다. [쿠쉬나메]는 쿠쉬의 책이라는 뜻으로 이 서사시의 주인공이자 영웅이라고 한다.

이 서사시에는 7세기 중엽 멸망한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유민들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는데 지도자 아비틴이 바닷길로 유민들을 이끌고 신라로 와서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아비틴은 신라왕의 환대를 받고 마침내 신라 공주 프라랑과 결혼하며 둘 사이에 태어난 왕자 파리둔이 후일 아랍군을 물리치고 조상의 원수를 갚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뒷부분만 빼면 처용의 설화와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많다.

[쿠쉬나메]는 11세기경에 만들어져 구전되다가 14세기에 필사되었으며 그 원본은 영국에 소장되어 있다. 이란에서는 이 책이 1998년 인쇄본이 출간되면서 본격적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와같은 처용 설화를 바탕으로 춤을 추는 처용무(處容舞)는 섣달그믐의 나례(儺禮) 또는 궁중이나 관아의 의례에서 처용(處容)의 가면을 쓰고 잡귀를 쫓아내는 벽사적인 춤으로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춤은 1971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 문제가 전세계를 흔들고 있다. 이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처용무를 출 수는 없지만, 신라시대 시기에도 전염병 예방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처용무를 추었다는 것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거진 뒤에야 요란을 떠는 것보다는 현명한 행위로 여겨진다.

어쨌거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빠른 시일 내에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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