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정한론을 경계한다.

▲ 정연철 호담정책연구소 소장(국제뉴스DB)

우리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 국가인 일본으로부터 가장 많은 침략을 받았고,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시대 시기로부터 왜구라는 이름으로 한반도를 괴롭힌 사실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이어 1901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식민통치까지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그리고 일본의 한반도를 발판으로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욕은 아베 정부가 집권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 같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이라는 의식 밑바탕에는 '정한론'이 자리하고 있다. 이 정한론은 일본이 에도막부 시대를 청산하고 메이지유신이라는 국가적 혁신을 이룬 직후인 1870년대에 일어났다.

특히, 일본에서는 1873년에 정한론이 정치 문제화되기도 했는데, 잠시 잠잠하던 정한론이 1875년 일본 운요호가 강화도를 침공하여 사건을 일으키고 강압적으로 체결한 강화도조약으로 정한론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불타오른 정한론의 종착지는 1910년 8월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의 역사로 나타났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할 사실은 일본이 주장하는 정한론에는 몇 가지 왜곡된 역사적 사실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 기사', 일본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설', 그리고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발견된 '칠지도' 등이 그것이다.

이들 역사적 사실을 간략히 살펴본다.

먼저, 광개토대왕비 관련이다.

이 비석은 414년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와이 세웠다. 응회암 재질의 석재로 높이가 약 6.39m,  면의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1.46m이지만 전체적으로 고르지는 않다.

비석의 네 면에는 1775자가 예서로 새겨져 있는데, 이들 글자중 150여 글자는 판독이 어렵다. 비문의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 역사와 광개토왕의 업적이 주된 내용인데, 이 중 '신묘년' 기사 일부를 일본이 발췌하여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로 왜곡시켜 활용하고 있다. 

문제의 신묘년 기사는 다음과 같다.

원문은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잔(백제),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해석을 보면,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내습하니 바다를 건너 백잔, □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와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 (사진제공=호담정책연구소)광개토대왕비의 초기 모습(출처 : 네이버)

일본인 학자들은 이 기사를 4세기 후반 일본 신공황후의 한반도 남부지역 정벌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주장하였고, 이러한 주장은 임나일본부설로 이어졌다.

여기서 광개토대왕비를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자.

비석이 세워진 414년의 시기는 5세기 초반으로 서양은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리된 상황이고, 중국에선 위진 남북조시기이며, 일본은 아직 일본이라는 국호도 없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높이 6.39m의 거대한 비석을 세우면서 고구려 자신의 업적을 망라해도 부족할 비문에 '왜'라는 족속의 업적이 될 만한 내용을 삽입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현재까지도 광개토대왕비의 내용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한 비석이라는 사실과 명확하게 판독되지 않고 있는 150여 글자에 대한 확인을 거쳐야만 이 비석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다음으로 일본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설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공황후는 200년 오진천황을 임신한 채로 한반도에 출병하여 신라를 정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신라왕은 일본군이 도착하자 스스로 결박하였고, 말과 마구를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신공황후는 임신한 배에 돌을 대어 출산을 늦추었고, 일본에 돌아가 치쿠시에서 오진천황을 출산했다고 전하고 있다.

신공황후의 이러한 삼한정벌 이야기는 구한말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할 때 출병의 명분으로 삼았던 설이기도 하였다. 신공황후의 활동시기에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기록에는 이와 관련한 어떠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오로지 일본 스스로 엮어낸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을 원용하여 주변국 침략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은 비난 받아 마땅할 것이다.

끝으로 칠지도 관련이다.

칠지도는 일본 덴리시의 이소노카미 신궁에 전해져 오는 철제 칼로 1953년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칠지도는 '일본서기'에 언급되어 있었던 관계로 이 칼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신공황후 이야기의 신빙성을 증명하는데 이용되었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칠지도의 실재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설에 대한 증거로 원용되어 한반도 병합의 역사적 이유로 작용되기도 하였다.

문제의 칠지도가 일본에 소재하고 있었던 관계로 이 칼에 대한 연구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일본 학자들은 이 칼이 백제왕이 일본 천황에게 헌상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63년 북한의 김석형이 이 칼의 명문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면서 고대시기 삼국(신라, 백제, 고구려)이 당시 왜에 식민지 국가인 분국을 세웠다는 삼한 삼국 분국설을 주장하면서 주목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칼은 백제왕이 헌상한 것이 아니라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새해 들어 일본의 아베 총리는 신년사를 통해 '평화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자위를 위한 군사가 아니라 전쟁이 가능한 군사력을 가지겠다는 것이다.

이미 용도폐기된 정한론을 다시금 떠올린 것은 21세기에 일본이 또다른 형태의 한반도 진출을 위한 새로운 '정한론'을 만들어 낼 우려 때문임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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