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와 송현마을 기훈암 금석문 통해 이순신 흔적 찾을 수 있어

▲ 사진설명 = 사진은 무장읍성 남문에 해당하는 ‘진무루’로 이곳을 지나면 좌측과 우측에 연못이 자리하고 있는데 좌측에 있는 연못은 일제치하 우리 민족의 가슴 아픈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연못이다. 또한 바로 위에는 신유박해 때 갖은 고초를 받다가 개갑장터(현재 고창군 공음면 구수내)에서 숨을 거두기 전 최여겸 복자가 갇혀 있었던 옥사(獄舍)가 있는데 지금은 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고창=국제뉴스) 김병현 기자 = 민족 영웅 이순신 장군이 무장읍성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와 송현마을 정자 앞 바위에 새겨진 기훈암(記勳嵓)의 금석문을 통해 확인되었다.

무장읍성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 위치한 사적 제346호다. 고려 말 왜구들의 침탈이 극에 달하자 효과적인 방어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1417년( 태종,17)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지금의 자리에 건립한 평지형 읍성으로 축성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남아 있는 유일한 성(城)이다.

19세기에 제작된 무장읍지에 따르면 축성에 동원된 인원은 약 2만 여명으로 둘레는 1,470척, 높이 7척의 성벽을 쌓고 성 위에는 여장(女墻)471개를 만들고 옹성을 갖춘 남문과 동·북문을 세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장(女墻)은 성을 지키는 장졸들의 몸을 보호하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한 일종의 초소에 해당하는 곳으로 둘레 1,470척(약 445m)에 여장 471개를 설치하였다는 무장읍지의 기록을 토대로 지금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약 93cm마다 1곳씩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무장읍성에는 조선시대 각 지방의 사(社:조선시대 행정단위로 현재는 면단위)에 두었던 곡물 대여기관인 사창(社倉) 터가 발견되었는데 국내에서 발견된 사창 터 중에 가장 큰 규모에 해당한다.

이처럼 무장읍성은 여장과 사창의 규모로 보았을 때 전략적 군사요충지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왜구들이 서해안을 따라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한 호남의 마지막 방어선에 해당하는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이곳을 순시하였음은 당연하며, 난중일기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무장지역과 관련된 이순신의 흔적

기록은 두 곳에서 나온다. 첫 번째는 난중일기요 두 번째는 전북 고창군 무장면 송현마을 정자 앞 바위에 새겨진 기훈암(記勳嵓)에서 찾을 수 있다.

난중일기

9월11일/갑진.맑음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영광으로 갔다. 도중에 신경덕을 만나 잠깐 이야기하고 영광에 이르니, 영광군수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들어와 같이 이야기했다.

9월12일/을사.

바람 불고 비가 많이 온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와 한여경이 술을 가지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같이 이야기했다. 안세희도 왔다. 저물 무렵 무장에 이르렀다.

9월13일/병오

맑음. 이중익과 이광보도 와서 함께 이야기 했다.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옷을 벗어 주고 종일 이야기 했다.

9월14일/정미

맑음. 하루 더 묵었다.

9월15일/무신

맑음. 체찰사가 현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들어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9월16일/기유

맑음. 체찰사가 떠나가서 고창에서부터 장성에 이르렀다.

이상은 1596년 병신년에 기록한 난중일기에 나와 있는 기록을 기술하였다. 일기에 따르면 장군은 9월 11일 영광을 떠나 9월 16일 장성에 이르기 전까지 3일간 무장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장군은 어떻게 전란 중에 주둔지인 경상도를 떠나 전라도 지역인 영광을 거쳐 무장을 지나 고창에 이른 뒤 장성으로 갔을까. 이에 대한 답은 9월 11일 이전의 일기를 살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장군은 병신년 한 해를 관할지역 순시를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순시의 목적은 장기간 전쟁에 따른 물자보급의 이상유무와 가용 가능한 군의 병력규모 그리고 전쟁에 따른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1월부터 12월까지 일기 내용 대부분이 어느 지역을 들러 공무를 살핀 뒤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어서 이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송현마을 바위에 새겨진 이순신의 눈물

장군은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무장현에 머문 뒤 다른 관할지역을 순시하기 위해 발길을 재촉하는 데 아마도 북쪽 성문에 해당하는 북문을 통해 고창현으로 말 머리를 돌렸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길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는 무장 향교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잠시 말에서 내려 걸었을 것이며, 말(馬)을 조금 달려 송현마을에 다다르자 큰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 지필묵을 커내 전쟁 중 목숨을 잃은 부하의 넋을 위로 하고자 바위에 글을 새기는데 내용은 이렇다.

記勳嵓, 宣武原從功臣 金海 金公 緯 模 天貴 殉節碑, 萬曆 二十五年 十月 日 統制使 李舜臣 銘

기훈암(공을 기록한 바위) “선무종원 공신 김위, 김모, 김천귀가 싸우다 죽은 비, 1597년 10월 통제사 이순신 새김” (참고 萬曆은 중국 명나라 신종 연호로 만력 원년은 1573년이다. 명나라 말기 황제인 만년제가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장군이 무장에 머물렀다는 날짜가 기훈암에 기록된 날짜와 난중일기에 나와 있는 날짜가 1년 이상 상이하다. 이에 대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추측컨데 금석문을 새기는 과정이 늦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새긴 날짜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우리는 난중일기와 기훈암을 통해 민족 영웅 이순신 장군은 무장지역을 지나 고창으로 향했음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고창군은 이러한 숨어 있는 민족혼을 돼 찾는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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