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병학 칼럼니스트

제법 스산함이 묻어나는 전원에 귀두라미의 때 이른 소리가 가볍지 않게 들려온다. 요란하게 퍼붓던 소나기가 멎으면 이내 일곱 색깔 무지개가 곱게 치장하고 붉은 옥수수수염이 빛바래 는 계절의 중심에 있다.

파란 들빛 사이사이엔 누런 싹이 도드라지고 해바라기 씨앗은 짙은 검은색으로 탱탱해진다. 바람결에 휘둘리는 분홍 코스모스의 마른줄기가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조금씩 변해가는 들판엔 수확하고 난 양배추 그루터기에 새순이 올망졸망 돋아나고 깊게 패인 감자 골엔 굵은 알갱이가 띄엄띄엄 들어나는 풍경이다.

단 하나라도 더 알뜰히 수확하려는 흰 수건을 동여맨 아주머니의 고추 따는 손길이 분주하게 스쳐간다. 하늘이 이내 시커멓게 변하면 영락없이 한바탕 소나기가 세차게 대지를 울린다. 소나기 내리기 전에 품질 좋은 고추를 따 선별하고 곱게 포장을 하여야 더 나은 값을 받을 수 있기에 하늘의 눈치를 살펴가며 빠른 손놀림으로 알맞고 적당한 사이즈의 청량고추며 꽈리고추, 아삭이 고추를 부지런히 바구니에 채워 넣는다.

전원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이다. 삶이 윤택한 사람에겐 전원의 생활이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생활의 여유를 만끽하게 한다. 하지만 농사에 여념이 없는 농업인 부부에겐 전원이란 삶의 밑천이며 생활의 보금자리로 존귀한 직업이다.

그 직업이 그다지 윤택하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은 들쭉날쭉한 소득에서 발생하는 상대적인 빈곤감이다. 하지만 그 빈곤한 와중에도 흙에서 쐬는 자연바람이 마음을 반전시키기에 소담스럽다. 우리는 아주 쉽게 도농 간의 생활상을 재단하고 그 재단이 사회경제 시스템에 맞는 것처럼 치부한다. 바로 도농간의 격차와 수준 말이다. 소득의 격차는 물론 생활 인프라의 격차, 문화의 격차, 교육의 격차든 보이지 않든 보이던 간의 격차는 상대적 박탈감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전원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공간과 여유를 제공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러한 격차마저 제공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전원의 농촌이 도시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목도한다. 무엇이 도시화 인가! 바로 사람의 도시화이다. 전원생활을 위해 귀촌하는 분들은 공고화된 도시생활이 농촌의 살가운 삶에 적응하는 속도가 쉽지 않다. 농촌에 귀촌해 있기는 하지만 도시의 습성이 몸에 배여 도시 식으로 살아간다.

모 언론매체에서 발표한 자료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농촌연구기관의 자료라며 발표한 내용은 현실의 어두움을 그대로 드러낸 탁상머리 행정이 여과 없이 담겨있다. 한마디로 귀농, 귀촌한 인적자원이 마을의 리더로 속속 진입을 하여 농촌 마을에 활력소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농촌은 고령화 되었고 귀농귀촌 인구와 역전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고령화 현상과 더불어 기존의 농업인은 농업의 규모가 다양화 되고 늘어나면서 사실 마을일을 귀찮게 여긴다. 또 여기에 마을일에 큰 보람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이장을 제외한 새마을지도자. 반장 및 기타 마을의 지도급 일을 회피 내지는 꺼려한다. 자연스럽게 이 자리를 귀촌인 으로 채워 넣을 수밖에 없다.

목가적인 풍경, 훈훈한 인심, 맑은 산소, 실개천 등 전원은 한국의 멋이고 흙을 가꾸고 자연을 다루고 일구는 풍경이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른 건 바로 기존의 정주인은 대대로 내려오는 풍속을 유지 한다는 것이고, 귀촌인은 도시의 풍속으로 양분화 되어있다는 것뿐이다.

정주인 이던 귀촌인 이던 하나의 전원이 되어야 한다. 겪어온 풍속의 다름이 어쩔 수 없다 해도 하나로 가기 위한 상대적인 배려와 존중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전원의 삶! 공존의 힘으로 상생 지워져야 한다. 그게 바로 전원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방법이고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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