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기철(전 해군참모총장) 더불어민주당 국방안보특별위원회 위원장

▲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 겸 더불어민주당 국방안보특별위원장의 해군창모총장 재임시절 모습.(사진제공=더불어민주당진해지역위원회)

이충무공의 최초 해전 승전지인 안골만과 옥포만을 지척에 둔 창원시 진해구의 작은 바다마을 웅천에서 태어나서 평생 그 곳을 지켜온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의 이충무공 탄신 474주년에 즈음한 기고문을 담았다.

이 충무공의 불패 신화와 함께 공의 충정과 호국 혼을 각인한 채 40년 세월 해군에 몸담아 오대양육대주를 호령했던 전 해군참모총장이 그를 추모하며 올린 글이다.

불의한 누명으로 옥고를 치러야만 했던 이충무공의 삶이 그러했듯 그 또한 영어(囹圄)의 몸이었을 정 국가와 국민에 대한 변함없는 충정과 함께'포용과 화해의 큰 바다를 나아갈 거북선'의 항진을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다.

아덴만 여명작전의 영웅으로서 짜릿한 승전의 기쁨을 안겨줬던 그였으나 공의 우국충정에 비할 바 아니라며 그의 동상 앞에서 머릴 조아리며 드리는 고백서이다.(편집에 앞서)

▲ 끝없는 존경과 도전의 물음표

손자병법에서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이겨놓고 싸운다.'고 했다. 또 '자기를 알고 상대를 알면 일백 번 싸워도 절대 지지 않는다.'고도 했다. 나는 이 명언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이순신 제독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임란(壬亂) 당시 이순신 제독이 이끌던 함대가 23전 23연승을 할 수 있었던 동력은 공의 애국, 애민사상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또한 공께서 자기 자신을 잘 알고 먼저 자기를 이겼기에 가능한 승전이었다고 확신한다.

내가 태어난 곳은 이순신 제독이 해전에서 최초로 승리했던 옥포만을 지척에 둔 작은 바닷가 마을이며, 평생을 그 바다와 함께 살았고 지금도 해군의 요람 진해에서 진해바다와 옥포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절반이 넘는 40여 년을 해군에 몸담아 군인으로서 조국의 바다를 지키며 국민의 안위와 국가에 헌신하게 되었음을 일생의 긍지와 보람으로 여겨왔다.

나와 해군가족, 그리고 진해사람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끝없는 존경과 도전의 물음표를 새긴 이충무공의 족적을 되새김하고 후대에 계승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늘상 피부로 느껴 왔다.

▲ 진해 북원로터리에 있는 이순신 제독 동상 앞에서 해군들이 경례를 하고 있다.

▲ 환란 속에 손을 잡아 준 호국의 스승

때땨로 고난과 환란 속에서도 해군과 함께 오직 한 길로 매진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있었다. 그 분의 숭고한 애국, 애민 정신이 나를 지배하고 견인했기 때문이다. 해군생활 중 순간순간 위기가 닥치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공의 한결 같음이 나를 독려했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통영함 방산비리에 연루돼 강제 전역을 당하고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였다. 그런 황당하고 억울한 상황 속에 나는 이순신 제독을 마음 속에 그리며 수감생활을 견뎌냈다.

충무공께서도 한 때 모함에 빠져 옥에 갇힌 후 백의종군하며 그 어려운 고난을 극복한 사실이 거울이 되어 현실의 벽에 갇힌 나를 일으키고, 공의 끝없는 자기희생과 애국, 애민사상이 나를 더욱 성숙하게 하는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그러기에 공은 환란 속에서 나의 손을 잡아 준 호국의 스승이자, 국난의 위기를 호기로 바꾸는 지혜와 용기, 희망의 등대였음이 분명했다.

▲이순신 제독과 나의 학창시절

나는 진해가 고향이다.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이후 사관생도 생활을 포함한 대부분을 옥포만이 자리한 진해에서 근무하였기에 그 옥포만을 호령했던 이순신 제독에 대한 존경심과 친숙감은 남달랐다.

어린 시절 해안가에서 놀 때 동네 형들이 갯바위에 움푹하게 파인 곳이 이순신 장군의 발자국이라면서 공을 아주 신출귀몰한 영웅인 양 묘사했던 기억이 새롭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에는 진해 북원로터리에 우뚝 선 이순신 제독 동상은 가슴 뿌듯하리만치 늠름하고 자랑스러웠다.

이충무공 동상은 임진왜란 360주년을 맞은 1952년도에 국내 최초로 시민들의 성금으로 건립됐으며 당시 제막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했을 정도로 큰 의미를 지녔다.

큰 칼을 옆에 차고 부릅뜬 두 눈으로 남해 바다를 호령하는 모습이 대한의 기상과 군인의 늠름함을 표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해의 충무공 동상이 우리나라 동상과 영정의 표준이 돼 왔던 것이다.

매년 4월, 벚꽃이 피기 시작하면 진해에는 군항제가 열리고 전국의 상춘객들이 몰려들면서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이 중 단연 으뜸가는 행사가 이충무공 정신을 계승하는'추모제'인데 이를 통해 그분이 물려 준 구국 혼과 사랑의 정신을 되새기며 그 뒤를 쫓는 해군과 함께 진해에서 살고 있음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다.

내 유년과 소년시절, 왜 이다지도 많은 진해 사람들이 충무공 이순신을 추모하고, 존경하는 지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았으나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그 궁금증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생도시절 이곳 옥포만에서 눈을 뜨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늘상 부르던 군가의 가사에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그리고 군항의 북소리와 용맹스런 전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충무공 이순신'이란 수업과목을 통해 이순신 제독의 어린 시절부터 모든 해전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학습을 통해 보다 사실적으로 제독에 대한 존경심을 체득했으며, 해군의 간성이 된 것에 자긍심을 느꼈다.

사관학교 졸업 후, 훗날 내가 해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과목이 별도 없음을 확인하고 이유를 물었더니 "역사 과목이 없어져서 '충무공 이순신'도 함께 폐강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사관생도들이 해군의 역사와 우리 해군의 정신적 지주이자 롤 모델인 이순신 제독을 배울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따라서 교육 관계자에게"'충무공 이순신'과목을 포함시킬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당장 반영한다고 해도 검토 기간을 거쳐 2년이 지나야 가능하다"고 말해 "그렇게라도 해보자"고 제안했다. 이러한 제도는 사관학교로 부임해 오는 교장의 판단에 따라 교과목이 바뀌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제도라고 하니 아쉽긴 하였으나 그 취지는 이해가 됐다.

국민들이 자기 나라의 역사, 문화를 안다는 것은 자신은 물론 사회의 정체성을 갖고 그 나라의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기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우리 해군의 정신적 지주인 충무공 이순신을 사관생도들이 배울 수 없음에도 충무공 정신을 강조하고, 충무공의 가사가 들어있는 군가를 부른다고 해서 대한민국 해군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얼마나 느낄 수 있을까 하는 통찰이 요구된다.

▲ .황기철 제독의 프랑스 유학시절 이충무공에 대한 역사학 논문 일부.(사진제공=더불어민주당진해지역위원회)

▲ 세계사 속에서도 빛나는 이순신 제독

필자가 1990년 초 프랑스 해군대학에 유학 중의 일이다. 당시 나는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을 때 두 가지를 꼭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나는 선진국 해군의 군사 지식과 문화를 배워 우리 해군에 실정에 맞게 접목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와 대한민국 해군의 자랑인 이순신 제독과 거북선을 프랑스에 널리 알리는 일이었다.

따라서 유학길에 오르면서 우리 역사 문화에 대한 소개책자와 난중일기 등 이순신 제독과 관련된 여러 서적들을 준비해 갔다. 그러나 막상 현지에서는 불어로 의사소통 하는 것 자체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사실 고등학교와 해군사관학교에서 불어를 배웠고, 일반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하고 별도의 어학수업을 받아 일정수준엔 도달했으나 우리문화와 이순신 제독을 불어로 소개하기까지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또베가리(Couteau Begari) 교수가 담당한 전략 수업시간에서"한국은 과거 삼국시대를 겪었듯이 한반도 통일이 그리 쉽지 않다"면서 "16세기 말 일본이 한국(조선)을 침공했을 때 이순신 제독이 해전에서 연전연승함으로써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었다"고 언급했다.

순간 나는 가슴 한편 심장의 박동소리를 느낄 만큼 흥분했다. 프랑스 교수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부분적으로나마 관심을 가지고 또 이순신은 제독을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당시 동, 서독 통일이 막 이루어진 시점이라 세계인의 관심은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의 통일문제에 쏠려 있었는데, 구또베가리 교수의 견해로는 △통일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과 △일본이 한국(조선)을 침략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은 서구와의 교역을 통해 선진문화와 부를 축적하고 인근 한국. 중국과 자유로운 무역을 원했지만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지 않아 일본이 한국(조선)을 침략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축약된다.

당시 이 같이 왜곡된 한국 역사 강의에 프랑스 장교를 비롯한 20여 나라의 외국장교가 듣게 된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면서 이를 결단코 바로 잡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따라서 나는 다음날, 정확한 반론을 제기할 질문을 사전에 준비한 후 "한국은 고려와 조선시대 1천년동안 통일된 왕조를 이어온 저력 있는 민족으로 삼국시대와 무관하게 머지않아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점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덧붙여 "일본의 한국(조선) 침략은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정치적 야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음을 차분히 설명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구또베가리 교수는 수업 후 별도 자리에서 만나"프랑스는 데카르트가 태어난 논리적인 나라다. 그러므로 학생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런 생각이나 의도가 있다면 논문으로 역사지에 게재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는 유학 당시, 이순신 제독만을 간단히 소개 하려했던 생각이 발전해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나는 대학원 연구 논문을 통해 이순신 제독의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임을 밝히면서 일본의 한국 침략 배경을 입증해야겠다는 의욕으로 스스로 고난을 자초한 것이다.

구또베가리 교수의 추천으로 파리 1대학(소르본느)의 기 뻬드론시니(Guy pedroncini)역사학 교수를 소개받았다. 기 교수는 역사학, 특히 전쟁사 분야에서는 아주 유명한 교수로서 엥발리드(파리 군사박물관)에서도 큰 활약을 하고 있었다. 

해군대학 수업과 함께 일반대학원에서 수업과 논문 지도를 받는 과정은 참으로 힘들었다. 정해진 기한 내에 모든 과정을 마쳐야 한다는 압박감은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완숙하지 못한 나의 불어 실력은 논문을 쓰기에 적잖은 장애가 되었다.  

이를 극복하고자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프랑스 동료 장교들에게서 문장 작성에 대한 조언을 구했고 소르본느 대학도서관, 퐁피두센터 도서관 등에서 자료 수집에 몰입했다. 

자료를 찾으면서 놀랐던 것은 프랑스 도서관에서 보유한 장서 중에 과거 유럽 선교사들이 기록한 16세기의 아시아와 한국(조선)에 관한 책들을 볼 수 있다는 점과 일본이 자기나라 문화, 역사에 대해 불어로 번역해 프랑스 사람들이 알아보기 쉽게 편집해 놓았던 점이었다. 

일본은 그들이 펴낸 역사서적 가운데 한일관계사의 많은 부분을 왜곡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본을 연구하는 사람들조차도 일본인들의 주장을 원용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어 그 충격과 섭섭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역사와 우수했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 후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며 그 것이 곧 세계화를 이루는 첫 걸음이고, 국력신장이 될 것이란 확신으로 논문 작성에 임했다.

그렇게 1년 반에 걸쳐 대학원 수업과 논문 작성을 마쳤다. 나의 논문은 당시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관 문화원, 파리 소재 민간대학, 해군대학을 비롯한 여러 연구기관 그리고 당시 유학중에 있던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프랑스 해군대학 학장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연구 논문을 읽은 후 "한국에 이렇게 이순신 제독 같은 훌륭한 분이 있었음을 알게 됐고 그 분의 리더십에 큰 감동을 받았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꾸또베가리 교수는 이 논문으로 책을 만들자는 제의까지 했었고 소르본느대학 기 뻬드론시니 교수는 「Marins et Oceans」란 해양 역사지에 필자의 논문을 실어주기도 했다. 논문 내용에는'학익진(鶴翼陣)'등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전략과 전술, 그 시대의 함선과 무기체계까지 서술해 놓았다. 특히 거북선은 철갑선으로써 프랑스 최초의 철갑선인'La gloire'보다 261년 먼저 건조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이러한 논문 내용이 각 대학과 프랑스 군 및 역사학회에도 알려져 우리 역사와 군사문화의 우수성을 프랑스 전문가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다. 또한 이 사실이 우리나라 해군에도 보고되어 귀국한 후 참모총장 표창까지 받을 수 있었다. 1992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당시 프랑스 주재 국방무관인 김윤암 장군이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서"황 중령은 짧은 기간에 참 많은 것을 이루고 간다."라며 칭찬해 주었다. 후일담이지만 사실 나는 이와 같은 보람의 무게만큼이나 프랑스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힘들어 그 쪽을 향해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정도였다.

프랑스에서 나는 해군으로서 불어로 된 최초의 논문을 통해 이순신 제독을 세계에 알린 것은 무엇보다 가장 값진 일이라 생각하며 큰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2015년 이 논문을 충무공 탄신 400주년을 기념하며, 출판할 계획을 세웠으나 전역 후 힘든 시련의 시간이 찾아와서 무산된 것이 안타까웠다.

▲ 황기철 전 해참총장의 최근 사진.(사진제공=더불어민주당진해지역위원회)

▲ 충무공 전승의 리더십 정신

군 생활, 특히 바다를 무대로 하는 해군생활은 그 어떤 직업이 가진 환경보다 고되고 힘들다. 해군은 해군만이 가진 함정과 무기체계로 인해 특수성과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업이다. 덤으로 바다 위에서 거친 풍랑과 함께 바로 눈앞의 시야조차 분간키 어려운 해무와 싸우며 수개월을 함상에서 지내야 하는 등 큰 인내심이 없이는 결코 해군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 배를 타본 사람들은 바다가 얼마나 쉽지 않은 무대인지, 배가 얼마나 고독하며 인내해야 하는지 알 것이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면 수평선과 더 넓은 하늘이 끝없이 이어져 자유로워 보이지만 비좁은 선실

내부와 좁은 갑판은 개인의 활동공간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거센 풍랑과 파도를 만날 때면 롤링과 피칭을 만들어 신체를 꼼짝달싹 못하게 묶어놓기도 한다. 더욱이 일단 출항하면 육지로 돌아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기 때문에 심리적 압박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따라서 생활공간이면서 작전전투공간이기도 한 함상생활은 여러 도전적 환경 속에서 임무를 수행해 나가야만 하는 자신과의 부단한 싸움이자 협상의 연속인 것이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현대 해군은 장비가 우수하고 톤수의 증가로 생활여건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임무의 어려움이 이럴진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께서 이끌던 수군들의 고난은 가히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항해 장비가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물길을 파악하여 조함하는 것도 힘들겠지만, 왜군과 마주치면 전투까지 해야 하니 지옥이 따로 없었으리라.

특히 이순신 제독은 지휘관으로서 왜군의 능력에 따라 이에 대응하기 위한 무기를 만들고, 전술을 개발하며 작전을 짜고 이를 운용하기 위한 훈련을 체계적으로 시킨다는 것은 정말 고독하고 고단한 자신과의 싸움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없는 가운데 가난한 백성 중에서 수군을 선발하고 군수지원을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짐작케 한다.

조선시대에 가장 천민이 했던 일이 곧 배를 타는 수부 또는 봉화를 지키는 일이었다고 하니 당시의 어려웠던 시대적 분위기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에 더해 조정의 지나친 간섭, 해전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한 육군 상관의 무리한 요구, 그리고 명나라 진린 제독과의 조. 명연합작전을 하면서 쉽지 않았을 상호간 협조 등은 평소 남다른 인격을 갖춘 이순신 제독이라도 이를 극복하기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해군을 운영해 본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아무리 무기체계가 우수하고 많은 정보와 잘 훈련된 부하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지휘관의 훌륭한 능력과 리더십이 없다면 조직을 관리하기도, 전투에서 싸워 이기기도 어렵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임금에 대한 충성경쟁, 장수간의 알력, 부대 간의 전공 챙기기 등을 극복하는데 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순신 제독은 선조에게 미움을 사서 투옥이 되는 고난 속에서 '이게 내 나라냐'라는 자괴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조정에서 자신을 경계하고 정치적 올무를 씌워 죄인으로 만드는 상황에서 '아~ 내가 너무 멀리 왔구나' 하는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삼도수군 통제사인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충성스런 부하들의 사기를 꺾고, 백성들에게 왜 이런 불신을 받는 수모를 겪게 하는 것인가' 그런 억울한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과연 이순신 제독은 이같은 고통의 늪을 어떻게 헤쳐 나왔을까? 최악의 상황 속에도 해전마다 연전연승을 이룬 기적은 오직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과 나라에 대한 일편단심 충성, 그리고 왜적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일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이는 한 장수의 능력을 뛰어넘는, 호국의 열망과 초인적인 의지와 신념으로 일군 결과물이다.

필자는 이순신 제독의 이러한 정신이 바로 '충무공의 리더십 정신'이라 감히 말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 해군은 우리의 충무공 이순신의 리더십 정신으로 무장하여 바다로, 세계로 나아가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장병들의 군가가 영내로 부터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힘찬 뱃고동 소리로 출항을 알리면 바다로 향한 마음은 설렘을 더한다.

국민의 안전과 국익을 지키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이를 위해 장병 스스로가 자기를 지키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정신력과 강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힘들 때마다 우리 국민 모두를 지키고, 나라를 위해 정의로운 길, 희생의 삶을 택했던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있었기에 더 강한 해군, 더 큰 대한민국으로 나아갈 수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황기철 제독이 이충무공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명량' 감독과 배우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사진제공=더불어민주당진해지역위원회)

▲ 이충무공에 대한 호칭과 헤군의 정체성 확립

이충무공에 대한 호청과 관련해 간과해선 안 될 것이 있다. 공은 마땅히'이순신 장군'이 아닌'이순신 제독'이었으며 후대들 또한 그렇게 칭함이 옳을 것이다. 2005년 필자가 진해기지사령관으로 근무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고 통영 한산도 제승당에 참배하러 간 일이 있었다.

제승당 입구 안내문에 이순신 장군(General Yi)이라고 적힌 것을 보고, 돌아와서 관계자에게 "이순신 장군을 이순신 제독(Admiral Yi)으로 고쳐서 표기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영어로 적는 것은 외국인들을 위해서인데 육전을 담당하는 장군이 수군을 지휘하고, 해전에서 싸워 이겼다고 할 때, 누가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정말 이런 작은 부분부터 하나하나 고쳐나가야 한다. 이것은 해군 정체성의 문제이자 나아가 자존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순신 관련 유적지에 장군(General Yi)이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육군 중심 문화에서 탈피해 각 군이 가진 문화와 전통을 존중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현대전에서 전문성을 더욱 강화시키고 구성원들의 사기와 자부심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길이다. 각 군의 문화와 전통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 속에 많은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생활방식이다. 서로가 존중하고, 이해의 폭을 넓혀갈 때만이 조직이 더 강해지는 것이고, 세계화에 부응하는 선진 강국이 되는 것이다.

▲ 바다 위의 무적 철갑선인 거북선의 위용.(사진제공=더불머민주당진해지역위원회)

▲포용과 화해의 큰 바다로 나아가는 거북선

오늘 나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첫 해전지 옥포만을 바라보며 충무공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김 한다.

남과 북, 국토가 갈라진 나라. 동과 서, 마음이 갈라선 나라. 진보와 보수, 생각이 분열된 나라. 여와 야, 정쟁이 멈추지 않는 나라,,,. 사분오열된 이 나라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정신이 이순신 제독의 '충무공 전승의 리더십 정신'이라고 필자는 감히 단언하고 싶다. 그리고 '충무공 전승의 리더십 정신'이란 바로 애국, 애민, 창의, 정의, 희생, 책임완수, 선공후사 정신이다. 이 7가지 정신이 집약돼 소통과 창조와 혁신의 결실을 거둘 것을 믿는다.

그리하여 풍전등화 같은 조국의 바다 위에서 파고를 헤치며 승전의 나팔을 불었던 그 거북선은 오늘날 재창조돤 신형 철갑선으로 보다 밝은 미래로, 세계로 항진해야 한다.

그리하여 남과 북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화를 이루고 통일의 물꼬를 개척하며, 왜적과 맞섰던 그 무한능력으로 동과 서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지역 이기주의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진보와 보수, 이념의 다름도, 나라사랑, 국민사랑의 정신으로 소통하여 이순신 제독과 함께 거북선을 타고 포용과 화해의 큰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

끝으로 이순신의 정신과 리더십 발현에 앞장서고 계신 이부경 이순신포럼 이사장님과 임직원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한다.

 

황기철(전 해군참모총장) 더불어민주당 국방안보특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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