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전북 고창군 무장면 무장읍성 남문인 진무루다. 1894년 음력 3월20일 공음면 구수내에서 기포한 동학농민군은 남문인 이곳 진무루에서 포고문을 발포하며 기포의 목표와 행동지침을 포괄적으로 제시하였다. 기포를 주도한 것은 전봉준과 손화중이었고 이 때 모인 농민군의 주력은 손화중 휘하의 농민군었다. 당시 모인 농민군은 약 4천여명이었다

(고창=국제뉴스) 김병현 기자 = 오는 14일 열리는 ‘제1회무장읍성축제와 축성 602주년 기념행사’가 이틀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축제 제전위원회는 축성 602주년을 기념하며 올해 처음 열리는 축제인 만큼 만전을 기하는 손길은 바쁘기만 하다. 하지만 “예산이 많이 부족하다”고 한다. 고창군을 비롯해 많은 기관과 사회단체들의 후원이 줄을 잇고 있지만 턱 없이 부족한 모양이다. 때문에 환난상휼하고 덕업상권 했던 우리조상님들의 향약(鄕約)정신을 발휘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싶다.

축제는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다’란 주제로 군민과 내방객들의 어울림 마당, 읍성의 정체성 확립, 평상시에도 찾고 싶고 추억하고 싶은 특별한 추억제공 등을 테마별로 준비하였다. 또 당시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재조명하여 이를 연구하고 보존함을 목적으로 한다.

행사는 읍성 남문에 해당하는 진무루에서 제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고창군 14개 읍면에서 채취한 흙을 합치는 합토식이 축제의 클라이맥스가 될 전망이다. 합토식은 1417년 축성당시 전라도 각 관의 백성 2만여명이 동원되어 축조하였던 것을 기념하고 화합했던 협동정신을 기르고자 함이다.

무장읍성은 높이 60m의 사두봉을 중심으로 구릉형 야산을 장방형으로 에워싸고 있는 평지 읍성으로 구릉형 야산 너른 들판 한가운데 입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체성(體城)은 내벽과 외벽을 모두 돌로 쌓은 협죽식으로 둘레는 1,140m이며, 동벽 228m, 서벽 258m, 북벽 314m, 남벽 340m 정도다. 성문은 남문과 동문 2개소가 있었으나 현재는 진무루에 해당하는 남문만 남아있으며, 바깥쪽에서 반원형의 편문식 옹성을 설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성벽의 축조 방식은 성벽의 기저를 먼저 구획한 후 구릉을 L자형으로 깎아 석축부를 수직으로 쌓으면서 내탁하였으며, 발굴을 통해서 발견된 해자는 국내 최대 규모로 문종실록에 따르면 둘레 2,127자(약 6,390m) 로 성벽의 거의 두 배 규모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벽과 남벽, 북벽에서 일부 확인되었다. 위치는 성벽에서 적게는 2.4m, 많게는 6m 남짓한 바깥쪽에 있으며 넓이는 2.7m ~ 11m로, 이를 건너는 적교시설도 함께 발견되었다.

또 8차 발굴 때는 우리나라 최초 시한폭탄으로 알려진 비격진천뢰 6점이 원형 그대로 발견되었는데 당시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과학기술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고 있다.

무장읍성과 동학농민혁명=동학농민혁명은 인도의 세포이 항쟁,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과 함께 동아시아의 3대 농민혁명으로 일컫는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란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사상을 기반으로 한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음력 3월20일 제푹구민과 보국안민을 기치로 4천여 명의 농민들이 전북 고창 무장읍성에서 분기탱천 홀연히 포고문 발표를 기화로 시작되었다.

포고문의 주용 내용은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김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백성은 나라의 근본으로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악해지는 것은 뻔하다. 따라서 우리 무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에 불과하나, 임금의 토지를 갉아 먹고 임금이 주는 옷을 입으면서 호의호식하는 위정자들로 인해 망해 가는 나라 꼴을 좌시할 수 없어 온 나라 백성이 마음을 함께하고 억조창생이 의논을 모아 지금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을 생사의 맹세로 삼노라’란 내용으로 외세로부터 백성을 지키고,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인본주의 사상과 결을 같이 한다.

이처럼 3월20일 농민군들이 포고문을 발표하며 봉기하기까지 19세기 말 조선은 삼정문란이 극에 달한 시기로 민초들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변변히 없었다. 하지만 부패한 위정자들의 착취는 끝이 없었고 민초들에게 고통과 절망만을 강요하던 조선사회에 대한 분노가 결국 왕조를 향하고 있을 때 고부 군수 조병갑의 만석보에 대한 수세(水稅) 착취가 단초를 제공하자 1894년 1월 농민들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며 시작된 횃불은 전국 농민들로 하여금 횃불을 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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