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용 기자

▲ 백운용 기자

(대구=국제뉴스) 백운용 기자 = 아베 신조 자민당정권이 이끄는 현 일본정부는 4월1일 '레이와(令和)'라는 신연호를 발표했다. 아베가 전면에 나서 직접 레이와를 설명하고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들러리를 섰다. 아베는 레이와의 의미가 '아름다운 조화'라고 말하면서 대외주재 공관들에게 홍보를 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레이와는 영국 bbc방송에서 밝혔듯이 레이(令)는 'Order'(명령 순서, 질서), 와(和)는 'Harmony'(조화)로 표현했다. 그리고 '만요수'(万葉集)라는 일본 고대 4세기부터 8세기때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시가집(이것도 시기는 불분명하다)에서 순수 일본식으로 그 연호를 따온 것이라 밝혔지만 일본의 학습원대학교의 저명한 쯔루마(鶴間和幸)교수는 이미 그 보다 2세기 더 앞선 중국의 고대 시가집 문선(文選) 에도 기록돼 있기 때문에 아베가 말하는 순수 일본 것이 아니라고 밝혀 파문을 일으켰다.

따라서 이번 '레이와' 연호의 선정은 오로지 앞으로 있을 4월과 5월 선거를 앞두고 아베가 주체가 되어, 아베의해, 아베의 자민당 정권을 위한 정치적 쇼를 벌여 선거에 철저히 이용하려는 계산에 불과하다고 본다. 사실 여론조사에서 아베정권은 52%의 지지율을 회복했다는 것이 밝혀져 그의 정치적 쇼는 일단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이런 현상들을 가능케 하는 일본 천황제의 비밀은 과연 무엇인가? 지금부터 그 비밀을 낱낱이 파헤쳐 보면 일본 보수지배층을 대변하는 자민당정권의 아베신조, 아소다로 등과 같은 인물들이 전후 한결같이 왜 역사반성을 전혀 하지 않고 더욱 보수우경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지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일본 제1대 천황은 신무(神武)라고 일본역사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진위는 불분명하다. 이 신무라는 천황의 명칭은 일본 고대 나라시대 말에 어떤 학자가 중국의 오래된 물건으로부터 글자를 선택하여 안녕(安寧),…효소(孝昭),…효안(孝安), 효원(孝元), 개화(改化),…경행(景行), 응신(応神), 인덕(仁德) 등으로 천황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또 신무를 초대천황으로 치더라도 신무는 127세, 효소는 114세, 효안은 137세, 경행은 147세가 되어 초대의 신무로부터 인덕까지 100세 이상의 천황이 12명이나 된다. 정말로 이상한 이야기다. 이는 고대의 천황제에 대해 일본 천황제 지지학자들 및 아베를 비롯한 보수지배 자민당정권이 날조된 신화를 그대로 믿고 만세일계의 천황가문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당시 고대 일본 야마토(大和)라는 영토에는 천황씨(天皇氏)와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의 세력을 자랑하는 많은 씨족 수장들이 연합하고 있던 형편이었다. 이렇게 연합되어 있던 수장들은 빈번히 투쟁과 권력 쟁탈전을 벌였으며 천황씨 내부에서도 반란과 권력쟁탈이 만연했다.

천황씨는 소가씨(蘇我氏), 모노베씨(物部氏), 후지와라씨(藤原氏)등의 호족과 동맹, 혹은 대립을 반복하던 형국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천황씨인 나카노오오에(中大兄)황자가 후지와라(藤原鎌足)등 호족과 손잡고, 소가(蘇我入鹿)씨와 손잡은 황극(皇極)천황을 죽이고 대화개신(大化改新)을 단행하였다. 이때 이 황자가 바로 덴치(天智)천황이라고 명명되고, 대화(大化)가 바로 일본천황 최초의 원호라고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천황제 지배는 비로소 나니와(難波:지금의 오오사카)와 관동지방, 동해안의 일부에 미치게 되었다. 지금부터 약 1300년 전의 일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 볼 때 이노우에(井上淸)학자도 지적했듯이 처음부터 천황에 의해 만세일계의 통치권이 확립되어 있다는 것을 신비화하기 위해 천손강림, 신무천황의 노리개, 3종의 신기(거울, 칼, 옥반지: 이것은 대륙으로부터 수입품이다. 당시 호족들은 이러한 제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등의 말을 구사하여 거짓말 신화를 창조했던 것이다.

참고로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는 당시 야마토 시대 때 당나라와 물물교환을 하면서 중국이 외교문서에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쓰니까 이걸 본 따서 일본 왕을 '天皇'이라 지칭했다고 하며 또 '천황제(天皇制)'라는 용어는 일본이 1945년 8월 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공산당이 천황의 폐위를 주장하면서 처음 천황제라는 용어를 썼다. 이것이 지금까지 일반화되어 통용되고 있다.

또한 천황들은 지금 까지 알 수 있듯이 성이 없고 이름(고대의 神武, 天智,…근대·현대의 히로히토(裕仁), 아키히토(明仁), 나루히토(德仁) 등에서 볼 수 있듯이)만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천황가문이 고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일본의 모든 성을 퍼뜨린 만세일계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굳이 성이 필요 없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주장이다.

오늘날 달나라나 화성을 탐험하는 시대에 이런 황당한 논리가 일본국민들에게 각인되어 당연시 하듯 받아들이고 자민당정권의 보수지배층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순치되어있으니 참 불쌍한 마음도 들긴 든다.

한편, 대화개신에 의해 확립된 천황제는 중국 당의 제도를 본받아 근강령,대보율령, 양노율령 등 통치조직을 정비하여 나라(奈良)시대(710년, 元明…聖武…光仁天皇)부터 헤이안(平安)시대(794년, 恒武)…安德 , 後鳥羽天皇)초기까지 전국(일부지역 제외)을 대체로 지배하였다.

그러나 헤이안시대 중엽부터 천황 혹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옛날 귀족연합체가 전국의 토지 및 사람을 소유하던 大化개신의 원칙은 무너지고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됐던 관리들, 황족, 후지와라씨(藤原氏) 등 모두 중앙으로부터 독립된 영지의 소유주인 영주가 되었다. 이른바 장원제도를 바탕으로한 봉건제가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 뒤로 명목상으로는 300년 남짓 동안 천황제 조정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장식물에 불과했다.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후지와라씨(藤原氏)가 섭정과 관백을 통해 태정대신 등이 천황을 마음대로 즉위시켰다 폐위시켰다 하면서 떡 주물 듯 했다.

따라서 이시기에 이르러 천황제는 지배계급과의 관계 속에서 상대화 된 존재 즉, '성'(聖:신성성)과 '속'(俗: 세속정치 즉 정치권력)이 이원화된 천황제였다. 이 후 장원영주들과 무사들은 미나모토 요리토모씨(源賴朝氏)와 다이라씨(平氏)의 양대세력으로 나뉘어 자신들만의 입맛에 맞는 천황이나 上皇을 자기편으로 해서 대전쟁을 벌인 것이 호겐(保元)의 난과 헤이지(平治)의 난(保元·平治: 당시의 연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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