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균 고려대 교수, 관련 자료 발굴·연구...거창읍·남상면 등 모의 기록, 일제군대 파견 기록 등

(거창=국제뉴스) 이종필 기자 = 거창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 관련 새로운 자료가 발굴돼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가 지난 22일 거창대학 다목적강의실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 거창평화축전' 학술심포지엄 발표에 따르면 거창 3·1운동은 이미 알려진 가조와 위천 만세운동과 파리장서운동이 있으나, 새로 발굴한 사료를 검토해 본 결과 몇 차례 만세시위 계획이 더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그 증거로 일제가 만든 '소요사건일람표'를 들었는데, 4월 말 통계표에는 거창 만세운동이 총 6건 기록돼 있다. 이는 이전에 알려진 가조면 2건의 만세시위 외에도 4건이 있다는 것이다.

사건을 구체적으로 보면 1919년 3월 15일 거창, 3월 24일 남상, 4월 3일 거창초등학교와 위천면 남산리에서 각각 만세운동을 계획했다가 일제 헌병에게 발각된 사실이다.

신 교수는 또 기존에 잘 알려진 4월 8일 위천 만세시위는 어떤 통계표에도 나타나지 않는데, 이를 근거로 통계에서 빠뜨린 사건이 더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소요사건일람표'는 3·1운동 당시 일제 헌병과 경찰이 일본군 관할지에서 일어난 사건을 긴급하게 전보로 보고했는데, 조선총독부가 이 사건을 모아 10일, 한 달, 두 달 단위로 만든 통계표를 이른다.

신 교수는 논문에서 일제가 3·1운동 당시 군대까지 파견한 사실을 새롭게 제시했다.

신 교수는 거창 3·1운동을 진압한 헌병과 군대 기록은 1919년 3월 20일 가조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거창헌병분대가 다급하게 대구헌병대에 구원을 요청했고, 대구헌병대는 사태를 위험하게 보고 헌병 특무조장 등 16명을 급파한 기록을 사례로 들었다.

또 3월 22일 2차 가조 만세시위가 일어나 시위 군중이 거창읍으로 밀고 들어오자, 거창헌병분대는 일본군에 지원을 요청해 진주에 주둔하던 일본군 보병 80연대 1개 중대를 거창에 파견한 사실도 밝혔다.

 당시 파견된 일본군이 헌병과 함께 둔마마을 앞에서 시위군중에 총격을 가했던 장본인이라고 설명했으며. 당시 일제가 군대까지 파견할 정도로 거창지역 3·1운동 기세가 대단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삼일 독립운동 당시 일본인으로부터 피살당한 애국자' 명단을 소개했으며,  이 문서는 1952년 정부에서 조사한 것으로, 각 면에서 신고받은 내용을 확인 절차를 거쳐 정부에 보고한 원본이다.

총 3건으로 각각 가조면 7명, 가북면 2명, 기타 지역 21명 희생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기타 지역 희생자 문서에는 1919년 3월 6일, 거창에서 5명이 총살당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2013년 6월 주일 한국대사관 이전 과정에서 발견된 자료 등을 통해 "3·1운동 직후 일제 헌병 50명이 흰 옷을 입은 한국인 5명을 위천으로 끌고 와 구덩이에 밀어 넣고 총살한 후 파묻었다"는 증언을 확보했는데, 5명의 희생자 기록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주목할 점은 이들 5명 희생자 문서는 시기로 보아 지금까지 밝혀진 거창지역 3·1만세운동 관련 가장 빠른 기록이라는 것이다.

신 교수의 논문을 종합해 보면 파리장서운동을 포함한 거창 3·1운동은 2월 19일 시작되어 4월 8일까지 40여 일 동안 계속되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특히 총 10회의 3·1운동 시도가 있었고 그 중 만세운동 3회·파리장서운동 1회가 성공했던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그동안 만세운동이 보고되지 않았던 거창읍에서도 몇 차례 만세운동이 시도되었고, 3월 22일 거창 장날 만세시위가 있었다는 정황도 드러나 거창 지역 3.1만세운동의 또 다른 기록의 존재 가능성이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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