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의 라보엠 공연은 많은 관객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컸다.

(서울=국제뉴스) 박준석 기자 = 국립오페라단은 지난 12월 6-9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푸치니의 라보엠을 공연 했다. 이 공연은 무엇보다 경기필에서 예술감독 및 상임지휘자로 성공적인 4년을 보낸 성시연이 지휘를 맡아 많은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성시연의 오페라는 기대와 달리 성공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무엇보다 가사와 음악이 따로 놀아 첫 막의 주옥같은 아리아 두곡이 관객의 호응을 끌어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출신의 소프라노 이리나 룽구는 빛나고 아름다운 소리로 관객을 매료시켜서 공연을 살렸다.

지휘자 성시연의 오페라 지휘는 발전중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국립오페라단이 실험무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휘자의 세계에 대해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카라얀등의 지휘자를 심포니 지휘자로 알고 오페라지휘자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고 음악이 이미 언어이므로 오페라의 가사를 대략적으로 이해해도 오페라를 지휘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알고 있는 다른 하나이다.

심포니지휘와 오페라지휘는 다른 세계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오페라지휘자이면서 심포니 지휘자들이다. 아바도, 사이먼래틀, 바렌보임, 쥬빈메타, 카라얀,등등 그렇지 않은 지휘자가 없을 정도이다.

심포니만 지휘하는 지휘자는 있을지 모르지만 오페라만 지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오페라극장의 상임을 오랫동안 해서 심포니 지휘를 할 기회가 없었을 수는 있지만 오페라지휘가 다른 세계라고 보는 것은 잘 못 됐다.

그러나 오페라는 심포니에 비해 거의 4배 이상 길고, 가사가 있는 음악이다. 그래서 훨씬 더 준비가 필요하다. 가수들의 가사는 멜로디의 모양새의 이유가 된다. 오선지위에 그려진 음정과 박자로만 노래의 모양새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대략의 정서나 말의 뜻만 알아서도 안 된다. 그러니 이런 준비가 되지 않을 때는 2시간짜리 교향곡을 듣게 될 수가 있다. 

성시연의 오페라는 그의 실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페라에 대한 이해의 문제로 보여 지고 그래서 다음 오페라가 궁금해진다.

단지 아쉬운 것은 국내에 오페라를 지휘하는 많은 지휘자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립오페라단이 오페라 팬들이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들 일색으로 지휘를 채운 지 10년이 넘어가는 가운데 우리나라 지휘자를 세운 것이 오페라연주를 두 번째 하는 성시연이라는 것이다. 무대는 스타를 만들어 주는 무대가 있고 스타들이 서야하는 무대가 있다.

국립오페라단의 지휘는 서서 성공적인 오페라를 반드시 보여줘야 하는 자리이다. 보통 경우 공연이 성공적이지 못하면 음악감독 곧 예술감독이 책임을 져야하기에 누구도 실험을 하지 않는 것이 우수한 오페라극장들이다.

 

무대와 연출은 아쉬움이 많았다. 재연공연이라서 대충했다는 느낌이 든다.

1막의 부대는 무대의 대부분을 비워둔 채 암전으로 채우고 로돌포와 친구들의 다락방을 가운데 솟은 섬처럼 좁히고 올려 세웠다. 보통 무대를 올려 세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객석에서 무대가 잘 보이고 소리도 오케스트라를 뚫고 잘 나가기를 바라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대를 좁힘으로서 무대의 에너지를 좀더 응축시켜서 관객이 보다 더 이야기에 집중시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동일 재연출은 그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4명의 남자배역들이 마치 닭장속의 닭들처럼 쉼 없이 팔을 휘저었다.

그래서 4명이 스스로를 소개하는 장면들임에도 후다닥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 무대의 특징이 중간 윗부분이 소리를 먹는 지점이었는지 남성성악가 4명의 소리가 무대를 채우기 보다는 모기처럼 앵앵거렸고 성악가들이 2막에 오케스트라피트 앞에 와서야 비로소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1막은 극의 대본상 재미있는 장면이다. 그들이 웃기게 연기해서 웃겨지는 게 아니다. 그들의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진실하지 못한 모습들은 젊고 가난한 예술가 곧 보헤미안에게 주어져야하는 연민과 따뜻한 시선을 받을 수 없었다.

라보엠은 사실 미미의 등장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미미의 노크 소리와 "스쿠지(excuse me!)라는 음정을 팡파레 삼아 미미가 들어오는 순간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때 로돌포는 책상에 앉아 글을 쓰며 빛이 창조되는 순간의 어두움이 되어야 한다.

그가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나타내려고 부산스런 움직임으로 표현하면 미미의 등장은 빛이 죽는다. 그리고 심지어 미미는 무대 가운데 섬처럼 지어진 세트를 걸어서 들어와야 했다. 들어오는것도 하나의 장면이라면 빛을 좀 주었어야했고, 아니라면 무대뒤에서 숨어들어오는 것이 첫 만남 장면을 살릴 수 있었다고 보여 진다.

그리고 시인 로돌포와 가난한 여직공 미미가 만나는 순간은 로돌포가 미미를 꼬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 남녀가 만나 천둥치는 사랑이 발생하는 장면이다. 이런 장면이 아름다우려면 절제된 움직임은 필수다. 보통은 가수나 배우의 역량으로 해내야 하지만 연출은 그들의 행동이 이야기에 방해되지 않도록 결과를 내야하는 일이다. 연출이 바람둥이 시인과 동네의 처녀들이 만나는 이야기를 그리려했다면 성공했다.

마치 수화를 하듯, 손과 몸짓으로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라고 말해주는 것이 연기라고 착각하는 성악가들이 많은 듯하다.

연기는 배우가 하는 말 곧 노래가 연기다. 연광철은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손가락 까닥하지 않고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채 아들을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괴로움을 다 표현했다. 그의 외로움과 번민이 오직의 그의 소리와 그림으로 대구 오페라하우스 무대와 객석을 가득 채웠었다. 아마 누구였다면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척을 하면서 무대 이곳저곳을 비틀거리며, 거친 숨소리를 날려가면서 불렀을 것이다.

마지막에 첫 막에 없던 새하얀 침대를 들여놓은 것과 눈부신 베개는 사소하지만 눈에 거슬렸다. 테너 정호윤은 비교적 오페라를 많이 하는 가수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연기가 아니라 연기를 하는 것을 보여주려는 바디랭귀지 같았다. 아마도 이태리어를 이해시키려했을 것 같다. 하지만 자막이 없어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무엇보다 마지막 "미미" 두 번을 집중해서 들리도록 불러주었으면 했다.

테너정호윤의 고음은 아주 수월했고 충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오페라는 중저음이 더 많다. 그의 중저음은 들리는데 집착해서인지 닫혀서 거칠고 날카롭고, 풍부하지 못한 빛깔을 보였다. 그래서 로돌포의 낭만적인 느낌을 살리는데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국립오페라단이 라보엠을 한다는 것은 사실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56년된 국립오페라단이 앞으로도 라보엠을 많이 할 것이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가능한 안 해야 한다. 시민들이 겨울에 라보엠을 보고 싶을 것 같으면 민간오페라단에 지원을 해주면 된다. 어차피 국립오페라단과 민간오페라단의 차이는 제작비의 차이밖에 없다.

둘 다 합창하는 사람들도 같고 가수들도 같은 경우가 태반이다. 무대 제작하는 회사도 같고 의상도 같은 회사가 한다. 그리고 국립이나 민간이나 전속 단원이 없고 공연장도 없으니, 민간에게 공고를 내서 순차적으로 지원해주면 될 일이다. 유쾌한 미망인, 코지 판 뚜떼, 라보엠으로 이어지는 것은 대학생들의 오페라 클래스의 라인업 같다.

국립오페라단에 정말로 필요한 기능은 예술감독이다. 지금도 예술감독이 있지만 국립오페라단에 요구되는 예술감독의 역할은 레퍼토리 선정과 예술진을 선정함에 있어 주관적으로 비전과 창의를 발휘하여 대한민국에 트랜드를 제시하는 역할이어야 한다.

그 시대의 예술가로서 그 사회를 읽어주고 이끌어 주어야한다. 뿐만 아니라 문체부 공무원들이 알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점들까지 이해시켜야 하는 역할이다. 그런 면에서 2018년과 2019년의 레퍼토리, 그리고 국립오페라하우스로 가는 것에 대한 윤호근씨의 부정적인 시각은 많이 아쉽다.

 

독자들에게 노파심으로.

기자가 실명으로 신랄한 비판을 하지만 그래도 유튜브나 티비로 보는 오페라보다는 공연장에서 보는 오페라가 몇 백배 즐겁고 좋습니다. 아무리 큰소리라도 귀를 찢지 않는 아름다운 소리는 지금까지의 어떤 음향기기도 제대로 재현해 내지 못합니다.

수 억 원하는 오디오로 카라얀의 음악을 듣는 것보다 2만원 티켓으로 공연장에서 듣는 클래식공연이 훨씬 낮다는 것은 공연장에 몇 번만 와보면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음반을 평가하는 일처럼 한심한 일은 없습니다. 기술을 평가하는게 음악을 듣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연자가 프로필이나 학벌로 어필할 수 없는 곳이 무대입니다. 그리고 BTS에 열광하는 사람이라면 열광할 수 있는 곳이 오페라공연입니다. 단지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연주가가 잘 하지 못 한 것입니다. 제가 비평을 쓴 것을 확인하는 재미도, 혹은 오류를 발견하여 호평을 하는 재미도 공연을 즐겁게 보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왜 계속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만 하는지에 대해 따지시는 것도 당연한 권리입니다. 물론 이태리어로 하는 이유는 백가지입니다만 관객이 편하게 들을 이유도 천 가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평을 실명으로 쓰는 이유를 굳이 말하라면 원래 무대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비평을 하는 것이 독자여러분이 무대를 찾아 나서는 일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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